유럽 축구의 빅 클럽 20개가 모여 새로운 리그를 창설한다는 취지의 ‘유러피언 슈퍼리그(ESL)’가 출범 발표 이틀 만에 중단됐다.
21일 새벽(한국시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6개 팀(리버풀, 맨시티, 맨유, 아스널, 첼시, 토트넘)은 ESL 참가 의사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19일 새벽에 ESL 출범이 발표된 지 약 48시간 만의 일이다.
이로써 19일 ESL 창설팀이라고 선언했던 12팀 중 절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ESPN에 따르면 이탈리아 세리에A의 AC밀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역시 탈퇴를 생각하고 있다.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ESL의 임시회장을 맡은 레알 마드리드를 제외한 모든 구단이 탈퇴를 고민하는 분위기다.
ESL은 21일 성명을 통해 “프로젝트 재구성을 위해 검토에 들어갈 것”이라며 ESL 대회 추진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ESL의 잠정 중단이 곧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우리 리그는 유럽의 법, 유럽 축구 규정에 어긋나는 부분이 없음을 이미 충분히 검토했다”고 밝혔다.
프리미어리그 6개 구단이 48시간 만에 철회 의사를 밝힌 건 영국 정부의 압박, 그리고 팬들의 압박이 거셌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국 정부는 ESL 창설에 반대했다. 올리버 다우든 문화부 장관은 19일 “ESL 출범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성명을 냈다. 이는 세무조사부터 시작해서 6개 구단에 대한 외국 선수 취업비자 발급 제한 등 구단 운영에 직격탄을 가할 수 있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여기에 축구팬들의 저항도 격렬했다.
21일 프리미어리그 첼시와 브라이튼 경기가 열린 스탬포드브리지 앞에는 수많은 축구 팬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팬은 소비자가 아니다’ ‘축구는 죽었다’ ‘슈퍼리그는 슈퍼-그리드(greed, 탐욕)’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했다.
프리미어리그의 유명 해설자를 비롯한 잉글랜드 현지 언론도 ESL을 비난하는 톤이었다. 프리미어리그의 인기 감독 및 선수들도 공식적으로 반대 성명을 냈다.
팬과 축구인들의 논거는 ‘노동자를 위해 만들어진 축구가 자본가를 위한 리그에 편입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자국 리그의 정통성을 해외 자본이 누르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 역시 엄청났다.
ESL은 미국 자본(투자은행 JP모건)이 주도했는데, 유럽 축구 팬들이 미국 자본에 대해서 품고 있던 불만과 분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측면도 있다.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아스널 등 명문 구단의 소유주가 미국 자본으로 바뀐 후 축구보다 매출에 신경을 쓰는 등 잉글랜드 축구 특유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현지 팬들의 반감이 있어왔다. 잉글랜드 노동자들에게 축구는 ‘스포츠 산업’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을 이번 ESL 출범을 이끈 미국 자본 측에서 간과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 ESL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법적 대응을 포함한 ESL 측의 반격이 나올지, 혹은 출범 팀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유럽 축구팬들의 커다란 반감만 얻으면서 ‘역대급 해프닝’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질지, ESL 출범을 둘러싼 논란과 사건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프리미어리그 6개팀이 ESL 탈퇴를 선언한 날, 잉글랜드 축구팬은 환호했지만 맨유 주가는 폭락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