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점권 괴물' 이정후(24·키움 히어로즈)가 2년 만에 시즌 100타점을 정조준했다. 히어로즈를 대표하던 간판스타들이 하나둘 떠난 상황이라 그의 '해결사 본능'이 더 빛나고 있다.
올 시즌 이정후의 타점 페이스가 가파르다. 10일까지 100경기(팀 102경기)에서 77타점(3위)을 기록, 경기당 0.77개씩 적립했다. 현재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109타점으로 시즌을 마친다는 계산이 나온다. 통산 두 번째 100타점을 넘어 2020년 달성한 개인 한 시즌 최다 타점(101개) 경신도 가시권이다. 그는 "찬스 상황에서 욕심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 KBO리그에 데뷔한 이정후는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정확한 타격으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타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프로 첫 세 시즌 연평균 타점이 57.3개. 주로 테이블 세터로 출전한 탓에 타점을 올릴 기회가 적었다. 박병호(KT 위즈)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제리 샌즈(한신 타이거스)를 비롯해 중심 타자들이 버티는 중심 타선에 찬스를 연결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이정후의 타점이 늘어난 건 3번 타순에 고정된 2020년부터다. 그해 키움 타선의 무게감은 남달랐다. 이정후는 3번 타순에서 반사 이익을 누렸다. 베테랑 서건창(LG 트윈스)이 앞 타순에서 찬스 메이커 역할을 했고 뒷 타순에는 박병호와 김하성이 일종의 '우산 효과'를 만들었다. 실점 위기에서 박병호와 김하성을 상대하기 버거워한 투수들이 이정후와 정면 승부를 선택했고 정확도 높은 타격으로 타점을 쓸어담았다.
공교롭게도 2020시즌이 끝난 뒤 키움의 주축 타자들이 하나둘 팀을 떠났다. 김하성이 지난해 1월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고 서건창은 7월 트레이드로 LG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겨울에는 팀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박병호마저 KT로 FA(자유계약선수) 이적했다. 타선의 무게감을 채우기 위해 키움은 지난해 12월 '쿠바 특급' 야시엘 푸이그를 영입했다. 이정후와 푸이그가 3·4번 타순을 맡는 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지만, 푸이그의 성적(84경기, 타율 0.259)이 기대를 밑돌면서 계획이 어긋났다. 이정후를 향한 상대 배터리의 집중 견제가 심해졌는데 이를 모두 극복해내면서 100타점을 향해 순항 중이다.
이정후의 찬스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시즌 득점권 타율이 0.390(100타수 39안타)로 리그 전체 1위. 그뿐만 아니라 득점권 장타율(0.710)과 출루율(0.488) 모두 1위다. 규정타석을 채운 50명의 타자 중 7할대 득점권 장타율은 이정후가 유일하다. 지난 시즌 득점권 타율도 수준급(0.341·6위)이었는데 올 시즌에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된 모습. 경기 후반인 7~9회 득점권 타율은 0.423(26타수 11안타)으로 더 높다. 이정후는 "작년에 클러치 상황에서 한 번씩 결과를 냈던 게 (올 시즌) 좋은 결과로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도쿄 올림픽과 두산 베어스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언급했다. 이정후는 지난해 8월에 열린 도쿄 올림픽 녹아웃 스테이지 1라운드 도미니카공화국전에서 9회 극적인 동점 2루타를 때려냈다. 대표팀을 벼랑 끝에서 구해내는 천금 같은 적시타였다. 3개월 뒤인 11월 와일드카드 결정 1차전에선 1만2422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9회 초 2사 1·2루에서 결승 2타점 2루타를 폭발했다.
도쿄 올림픽은 메달 획득에 실패했고,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도 탈락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득점권에서 남다른 집중력을 갖게 된 전환점이었다. 강병식 키움 타격 코치는 "득점권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면 긴장할 수도 있는데 이정후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집중력 있는 타격을 한다. 상대 투수의 실투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100타점을 향해 가고 있는 이정후는 "(두 번의 큰 경험은) 더 침착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바탕으로) 시즌 때 찬스가 걸리면 여유 있게 대처하려고 한다"며 "지금 선수들도 그때(2020년) 선수들 못지않게 잘하고 있다. (이 선수들과 함께) 다시 한번 100타점을 하면 기분 좋을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