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SBS가 절반씩 투자한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는 1998~99년 리모컨 조정 자동차(RC카)와 인라인스케이트를 내세워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RC카에다 새로운 요소를 가미해 '스피드왕 번개'의 후속작인 '트랙시티'에도 기획 참여했다.
완구로 수익을 얻으면 얻은 대로 애니메이션에 재투자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전국에 수십 개나 되는 대학의 만화·애니메이션 학과와 연관 분야에서 한 해 졸업생 6000여명이 배출된다. 애니메이션 제작·투자가 활성화돼야 안정된 기반이 조성되고, 그들이 지금까지 배웠던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또한 완구개발제작팀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발상의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주인공인 지니(남 11 세)가 가상 현실 속으로 들어가 컴퓨터 바이러스로 오염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바이러스와 트랙에서 RC카 경주로 싸운다는 '트랙시티'는2000년 1월 SBS에서 첫 방송을 했다. 이 작품의 주제가는 쌍둥이 소년 가수 량현·량하가 불렀다. RC카로만 보자면 '스피드왕 번개'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 내가 포인트를 둔 부분은 RC카 트랙이었다. '트랙시티' 주인공 자동차 '파란바람'은 트랙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차들과 계속 경쟁을 벌인다.
기존의 자동차 관련 완구 트랙은 통째로 완성된 것을 구입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한 뼘 크기의 '트랙시티' RC카가 달릴 수 있는 트랙을 블록과 같이 연결할 수 있게 조각으로 설계했다. 3㎝의 트랙 조각을 낱개로 구입해 조립할 수 있도록 했다. 좁은 공간이나 넓은 공간에 트랙을 조립·연결하면 다양하게 모양이나 각도 조절이 가능하고 분해해 집안에 관리하기도 좋게 했다. 조각을 많이 모아서 용이 몸을 뒤튼 형상의 트랙으로 멋지게 장식할 수도 있다.
완구 RC카 제작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근접지역에 다른 리모컨 조종 자동차가 있으면 그 리모컨 전파의 영향을 받아 우리 차까지 움직이게 되는 기술적 문제를 '스피드왕 번개' 때 겪었던 터라, 공장에 반도체 라인 같은 특별 방을 만들고 전파 테스트를 했다. 시험이 끝나면 특별 방의 구석에 식판 내미는 조그만 사각구멍 같은 곳에서 자동차를 빼낼 정도로 특별관리를 했다.
'트랙시티' 완구가 잘 만들어졌다. 그러나 '파란바람' RC카 완구만 팔리고 트랙은 생각만큼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막 변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도 자동차 완구와 트랙 세트가 문방구에 많이 깔려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아이들이 포탈로 가버리면서 트랙이 문방구에서 점점 사라졌다.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도 이 시기엔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트랙시티' 완구는 타이밍이 늦었던 것이다.
자동차 완구를 해외에 수출했다는 자부심을 세워보았지만, 계획도 여의치 않았다. '트랙시티'는 기획부터 2D와 3D를 섞어 작업을 했다. 당시로선 최대한 CG를 많이 사용했다. 2D와3D의 호환이 안된 듯 어정쩡하게 보여 화면은 정감이 떨어지는 역효과가 났다. 다소 재미가 떨어지고, 지루한 면도 있었다. 결국 힘들게 만들어놓고 '트랙시티' 필름을 해외에 패키지로 다른 작품에 끼어 넘겨주었다. 필름이 제 값을 받지 못한 채 완구도 갈 길을 잃었고 수출 길도 막혔다. 내게 아쉬움이 큰 작품으로 남게 됐다.
블록처럼 조각난 트랙을 끝없이 이어나간다는 아이디어로 특허까지 받아 놓고도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조금 더 빨리 생각을 해냈으면 '큰일'을 낼 뻔한 프로젝트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