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잔류’ 한국 아이스하키, 변방 탈출의 희망을 봤다
변선욱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3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 1 A그룹 대회에서 5위를 차지하며 내년에도 디비전 1 A그룹에서 세계선수권을 치를 수 있게 됐다.
평창 동계 올림픽 본선 진출이라는 한국 아이스하키의 지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아이스하키는 2006년 토리노 대회를 끝으로 동계 올림픽 개최국의 자동 출전권을 폐지했다. 한국 아이스하키가 평창 동계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개최국 자동 출전권을 반드시 부활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스하키 변방'이라는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 국제 무대에서의 좋은 성적이 절실하다. 르네 파젤 IIHF 회장도 세계 랭킹이 18위까지 올라가면 자동 출전권 부여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2013 IIHF 디비전 1 A그룹 대회는 한국 아이스하키가 주변부를 벗어날 잠재력이 충분함을 확인시키는 무대였다.
한국은 개최국의 이점을 지닌 헝가리를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5-4,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뒀고 일본을 상대로 5-6으로 졌지만 슈팅 수에서 45-24로 앞서는 등 우세한 내용을 보였다. 최종전에서는 영국을 4-1로 꺾었고 이에 앞서 5차전에서는 2-4로 졌다. 그러나 강호 카자흐스탄을 3피리어드에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기대를 훨씬 뛰어 넘는 내용과 결과였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우려가 적지 않았다. 김기성, 김원중, 박우상, 이용준 등 대표팀 주력들은 지난해 11월 상무에 입단, 충분한 실전 경험을 쌓지 못했다. 박우상은 무릎에 차오르는 물을 빼가며 훈련에 임하는 등 태릉선수촌 합숙 훈련 때부터 부상선수도 끊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헝가리와의 2차전에서는 이승엽(한라)과 김혁(하이원)이 부상을 당해 이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헝가리에서 놀라운 뒷심을 발휘했다. 매 경기 출발을 불안했지만 중반 이후 놀라운 집중력과 투지를 발휘했다. 강인한 정신력과 단합된 힘은 악재 속에서도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한국 체육사상 순수 외국인으로 처음 태극 마크를 단 브락 라던스키(한라)는 짧은 훈련 기간과 심리적 부담에도 불구. 3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히 헝가리와의 2차전에서 페널티 슛아웃(승부치기) 1번 슈터로 나서 골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대역전승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라던스키는 몸을 사리지 않고 육탄전을 펼치고 승리 후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등 한국 국가대표로서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던스키와 한 조를 이룬 김기성(상무)-김상욱(한라) 형제는 해결사와 도우미로 한국의 디비전 1 A그룹 잔류의 일등공신이 됐다. 연세대 1학년 때부터 대표팀에서 활약한 김기성은 팀 내 최다 득점(4골)과 최다 포인트(4골 2어시스트)를 올렸고 김상욱은 팀 내 최다 어시스트(5개)를 올리며 형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 '평창 올림픽 꿈나무'들의 잠재력을 확인했다는 것인 헝가리에서 거둔 또 하나의 큰 소득이다.
특히 20세에 불과한 대표팀 막내 신상훈(연세대)은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였다. 중동고 시절부터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이번 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국제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벼랑 끝 승부였던 영국과의 최종전 결승골의 주인공도 '뉴 페이스'였다. 올해 연세대를 졸업한 윤지만(한라)은 영국전에서 1-1로 맞선 2피리어드 9분 31초에 과감한 슈팅으로 결승골을 작렬하며 생애 첫 세계선수권 무대를 멋지게 장식했다.
개인사를 뒤로 하고 태극 마크를 선택한 베테랑들의 희생 정신도 대표팀에 큰 힘이 됐다. 수문장 엄현승(한라)은 6월 18일 입영 날짜를 받아놓은 상태에서 대표팀 합숙과 세계대회 출전을 기꺼이 선택하는 결단을 내렸고 이승엽도 군 입대를 앞두고 대표팀에서 투혼을 사르다 헝가리전에서 경추 골절의 중상을 당했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평창을 향하는 첫 걸음을 기분좋게 내디뎠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양승준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전무는 "강적 헝가리와 영국을 꺾었고 우리보다 전력이 우세한 팀들과 격차 없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한국 아이스하키가 최근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해외 우수자원 발굴 등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한 모든 일들을 차질 없이 준비해가야 한다"고 2013 디비전 1 A그룹 대회를 치른 소감을 밝혔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지난 2월 특별 귀화 심사가 반려된 브라이언 영(하이원)의 국적 취득을 재시도할 예정이고 여름에 북미 지역에서 대표팀에 수혈할 한국계 선수 발굴을 위한 트라이 아웃 캠프를 계획하고 있다. 또 IIHF에 내년도 디비전 1 A그룹 세계선수권 개최를 신청했다.
한편 내년 세계선수권 디비전 1 A그룹 대회는 다음달 스웨덴 스톡홀름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2013 IIHF 월드챔피언십(톱 디비전) 대회의 최하위 2개국과 한국, 헝가리, 일본, 우크라이나가 출전한다. 우크라이나는 20일 끝난 디비전 1 B그룹 대회 최종전에서 폴란드를 4-3으로 꺾고 우승, 디비전 1 A그룹으로 승격했다.
카자흐스탄은 최종전에서 이미 톱 디비전 승격이 확정된 이탈리아를 3-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