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생성형 AI와 엔터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작 효율성의 극대화와 창작의 본질이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음원 프로듀싱부터 버추얼 아이돌,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기술 도입은 제작비를 크게 낮추고 자본 장벽을 허물며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생존 무기와 IP 확장성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획 시리즈 [K팝과 AI 혁명]은 K팝 프로덕션의 세 가지 핵심 축인 작곡가 작업실, 버추얼 아이돌·팬덤, 뮤직비디오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술이 허무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인간 창작자의 가치와 K팝의 미래를 짚어본다.
십카페 입장을 대기 중인 플레이브 팬들의 모습. 사진=IS포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고즈넉한 한옥 골목. 늦더위가 기세를 부리던 8월 말, 낮 12시 30분 오픈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10~20대 학생부터 30~40대 직장인, 나아가 인도와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서 찾아온 팬들까지. 이들이 뜨거운 볕을 견디며 기다리는 곳은 5인조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의 공식 오프라인 카페인 아스테룸 433-10(이하 십카페)다.
십카페는 하루 수십 명의 예약 신청이 몰리고 예매창이 열리면 5분 만에 매진된다. 멤버 밤비의 생일 테마로 꾸며진 이날 공간은 1층에서는 팬들을 맞이하는 곳, 2층은 굿즈 숍, 3층 작업실 전시존 등으로 구성됐다. 3층 스피커에서는 정식 음원이 아닌 멤버들의 미공개 데모 음원이 흘러나왔고, 곳곳에 남아 있는 멤버들의 직접 방문 인증 낙서가 팬들의 몰입감을 더했다. 화면 너머로 팬들을 맞이하는 플레이브. 사진=IS포토
◆“어차피 화면으로 보는 건 똑같아”…실물 팬덤과 경계 허문 버추얼
현장에서 만난 팬들은 버추얼 아이돌의 첫 번째 진입 장벽인 ‘서브컬처(애니메이션)적 거부감’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부터 설명했다. 인천에서 온 김민지(36세)씨는 자신이 캐릭터 아이돌을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저는 소위 말하는 2D 애니메이션 덕질은 전혀 관심도 없고 본 적도 없거든요. 처음엔 다들 ‘내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게 맞나’ 하고 입덕 부정기를 겪다가 결국 인정하고 들어오더라고요. 이상하게 거부감이 전혀 없었어요.” 플레이브 팬 김민지 씨가 수집한 다양한 굿즈들. 사진=IS포토
이날 현장에는 40대 자매 A씨, B씨가 함께 이곳을 찾았다. 버추얼 아이돌을 수용하는 팬들의 방식은 실물 아이돌과 다를 바 없었다.
실존 아이돌과 플레이브를 동시에 덕질 중이라는 동생 A씨는 “진짜 사람 아이돌을 좋아하나 버추얼을 좋아하나 거리감은 똑같다”며 “어차피 내가 직접 만나서 밥을 먹을 것도 아니고, 화면으로 보고 콘서트장 가서 보는 건 매한가지 아니냐”며 버추얼에 대한 편견을 일축했다. 플레이브 멤버들이 십카페 곳곳에 남긴 낙서. 사진=IS포토
◆“포토카드는 무조건 A컷”…완벽한 비주얼과 ‘곱하기 5’의 소비 심리
이처럼 가상의 존재를 현실의 아티스트로 받아들인 팬들은 버추얼이기에 가능한 ‘완벽한 비주얼’과 ‘관계성’에서 실물 아이돌 이상의 만족감을 얻고 있었다. 언니 B씨는 버추얼 아이돌 특유의 압도적인 굿즈 만족도와 비주얼적 안정감을 강점으로 꼽았다.
“실제 사람 아이돌은 단체 컷을 찍으면 누군가 못 나온 아쉬운 포토카드가 섞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모든 포토카드가 최상위 A컷’이에요. 얼굴에 트러블이 날 리도 없고, 살이 찌거나 열애설이 날 리도 없죠. 굿즈 재질과 퀄리티도 기존 K팝 시장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러한 비주얼적 완벽함에 멤버들 간의 자율적인 ‘케미(관계성)’가 더해지면서 팬덤 특유의 독특한 소비 패턴이 형성된다.
A씨와 B씨 자매는 “보통 다른 아이돌은 최애 멤버 굿즈만 사지만, 플레이브 팬들은 라이브 방송에서 멤버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케미 때문에 5명을 다 좋아한다”며 “최애만 못 사고 무조건 5명 다 사다 보니 구매량이 기본 ‘곱하기 5’가 된다”고 전했다. 대형 스크린에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의 영상이 송출되고 있는 모습. 사진=IS포토
◆대가 없는 나눔과 ‘빨간약’ 금지…팬덤 스스로 만든 연대
실체는 화면 속에 있지만 팬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들어내는 온기는 그 어떤 실존 팬덤보다 뜨거웠다.
카페 내부 테이블에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가져온 나눔 물품들이 가득했다. 리본 공예품부터 인형 옷, 자체 제작 안경 닦이까지 초면인 팬들끼리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무료로 굿즈를 주고받는 장면이 연출됐다.
플레이브의 또 다른 팬에게 수공예 굿즈를 선물받았다는 김민지 씨는 “대가 없이 사랑으로 만든 굿즈를 나눠주는 문화가 너무 따뜻하다”며 “원래 낯선 사람과 말도 못 하는 극단적 내향형(I) 성격이라 늘 혼자 다녔는데, 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친구도 생기고 성격도 밝아졌다”고 웃었다. 플레이브 팬 A씨와 B씨가 소장 중인 다양한 굿즈들. 사진=IS포토
이러한 유대감은 세계관을 지키는 자발적 질서로도 연결된다. 취재 중 본체의 신상을 뜻하는 단어 ‘빨간약’이 언급되자 갑자기 정적이 흐른 것이 대표적이다.
팬덤 스스로 가상 세계관의 몰입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본체 정보를 언급하지 않는 일명 ‘빨간약 금지’ 문화를 엄격하게 지키며, 버추얼 IP의 몰입을 저해하는 위험 요소를 팬덤 스스로 차단·방어하고 있었다.
B씨 역시 가상 세계관을 지켜주는 팬덤 내 자율 규율을 강조하며 “본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눈앞의 캐릭터와 아티스트로서의 매력에 몰입하는 것이 팬덤 사이의 자연스러운 약속”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