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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전국서 출전마 가장 많았던 대구경마장의 자취

공인 경마가 시작된 지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9개의 지방경마장 중 휴전선 이남에 있는 4개의 경마장이 있다. 대구경마구락부의 법인 인가는 1927년, 경마는 1929년 시작됐다. 1933년 정식 공인 경마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금의 신천 동신교 동인성당 부근에 있었던 북리연구소(종두법연구소)의 대구출장소 부지, 달성공원 등지에서도 경마를 시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대구경마장도 군산경마장과 마찬가지로 그 터에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다. 그러나 대구근대사 전문 블로거 차경환 씨의 도움으로 해방 전 지도를 입수했다. 이로 인해 조금은 수월하게 옛 대구경마장의 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공인경마장 설립 이전 임시 경마장으로 이용했던 북리연구소(대구출장소)와 달성공원은 대구역에서 각 2㎞ 떨어져 있다. 춘계와 추계 연 2회 열렸던 지방순회경마 일정에 따라 기차로 대구역에 도착한 마필들이 경마장으로 이동하는 데는 20분 정도가 소요됐을 것이다. 군산경마장과 마찬가지로 역에서 시내 중심가로 퍼레이드한 후 경마장으로 이동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경주 일정을 보면 군산경마장에서 온 마필에 대구 지역 유지들의 마필이 더해져 5일간 경주가 열렸고, 다시 대구역을 통해 옛 부산경마장으로 이동했다. 시행 초기인 1930년 대구경마장 출주두수는 356두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같은 해 경성경마장 232두, 부산경마장이 299두였던 것과도 비교된다. 대구지역 유지들이 소유한 마필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공인 경마제도 이전에는 한강 백사장을 비롯해 전국 다수의 강변에서 경마를 개최한 사례가 확인된다.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은 마필이나 기수가 경주하기에 비교적 안전한 조건을 제공하며 경주 전후 마필을 씻기고 물을 먹이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제1회 경주가 열린 북리연구소는 대구역에서 멀지 않은 데다 금호강의 지류인 신천에 접해 있다는 점이 개최지의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공인 규격의 경마장 설립 이전까지 사용된 달성공원의 경우에도 신천의 지류인 달서천이 흘렀으며 실제 둘레길 거리가 약 1600m 정도로 걷는 데에만 20~30분 소요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외곽이 언덕처럼 솟아있는 지형이라 경주는 내부에 조성된 정원 안에서 시행하고 사람들은 그 외곽에서 관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32년 조선경마령 발표 후 공인경마장 이외에서는 마권을 판매하는 경마경기가 불가해졌고 마침내 대구에도 1933년 10월 25일 공인 규격의 주로가 들어선다. 위치는 대구역에서 약 3㎞ 거리에 있는 당시 행정구역상 원대동 일대. 약 4만평(현재 서울경마공원이 35만평)의 부지에 주로 약 1500m, 내부에는 1000m의 연습장까지 갖췄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계단식 관람대에는 약 4000명을 수용할 수 있어 경성경마장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기사도 확인된다. 근대 조선 최고의 사진작가로 꼽히는 최계복의 작품 ‘가을의 경마’에서 대구경마장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대동 대구경마장은 1961년 말 개인에게 매각되며 30여 년의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2021.10.29 06:58
스포츠일반

내년 한국 경마 100주년…최초 공인 경주로는 군산경마장에

2022년은 우리 땅에서 경마가 시행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 경마의 시작은 학생 체육대회 수준의 나귀 경주, 기병 경주에서 시작됐다. 본격적으로 근대 경마가 등장한 것은 1922년 서울에 사단법인 경마구락부(클럽)가 발족하면서부터다. 이어 평양·대구·신의주·부산·군산 등에 차례로 법인이 인가됐다. 1933년 조선경마령이 시행되고 전국 경마구락부를 총괄하는 사단법인 조선경마협회가 발족하면서 전국에 난립했던 경마 단체들이 정리됐다. 여기에 함흥·청진·웅기 세 곳에 경마장이 추가로 증설되며 전국 9개 경마장에서 순회경마의 시대가 1941년까지 지속한다. 당시 기수들과 참가 말들은 봄과 가을 시즌에 맞춰 전국을 순회하며 경기에 참여했다. 전북 군산경마장은 한반도 최초로 공인 경주로가 설치된 곳이다. 현재 군산경마장의 흔적은 구불구불 흐르던 경포천을 일직선으로 정리하면서 사라진 도랑들만큼이나 찾기 어렵다. 기록에 따르면 옛 군산경마장은 지금의 군산 동부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암동 지역에 위치했고 타원형 주로가 경포천을 따라 금강 방향으로 길게 놓여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경마장 부지에서 경포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그 뒤쪽이 바로 순회경마에 참가하는 말들이 기차에 타고 내렸을 옛 군산역 터다. 역사는 철거되고 철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백여 년 전 수십 두의 경주마들은 기차에서 내려 군산시가로 퍼레이드했다. 현재 남아있는 ‘경마교’는 1987년 팔마광장 근처에서 경마장 터로 다리를 놓으면서 관청에서 이름을 붙였다. 경암동 내에 있는 ‘경마경로당’도 마찬가지다. 유형의 자취는 아쉽게도 사라졌으나 이름으로나마 한국 경마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수확한 쌀의 수출항구로 일본인 거주자들이 많았다. 사람이 모이니 유희를 즐기려는 사람들 역시 이곳으로 모였다. 1923년 해안매립지에서 경마가 시행되다가 당시 경장리(지금의 경암동)에 2만1000평, 즉 7만㎡ 면적의 경마장을 조성했다. 국내에서 공인 규격의 고정 경마장이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이 서울과 군산이었다. 군산이 1927년 10월 준공기념 대회를 5일 동안 개최했고, 서울 신설동경마장이 1928년 9월에 첫 대회를 열었으니 군산이 1년이나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군산 경마장은 1928년 첫해에 87두를 시작으로 1929년 147두, 1930년 161두가 경기에 출전했다. 1930년도 마권 발매는 총 4만9577매, 매출은 9만9354원으로 이는 현재 원화가치로 12억2000만원 수준에 달한다. 1년을 기준으로 봄과 가을을 합쳐 약 10일 간 경주가 펼쳐졌고, 하루 평균 5000장 정도의 마권이 팔릴 정도로 인기 있던 스포츠였다. 군산시 인구가 10만명도 되지 않았다. 1941년 일본이 미국 항공기의 착륙을 막기 위해 주로를 폭파하면서 경마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2021.08.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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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마사회는 6.25 어떻게 겪었나

올해로 한국전쟁이 정전 60주년을 맞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3년 1개월 간 계속되다가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을 맺으며 일단락됐다. 6·25같은 전쟁이 또 한번 발발한다면 1500마리의 경주마가 생활하고 있는 서울경마공원은 어떻게 될까. 전쟁 발발과 동시에 마사회 직원들은 충무계획에 의거 비상소집, 전시 마필보호, 직장 민방위대 운영 등 일련의 조치에 들어간다. 경마는 중단되고 경주마와 관련 장비들은 군수 물자로 소집되게 된다. 마사회는 이런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계획팀’이라는 조직도 운영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신설동 경마장에서는 일요경마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시행했다. 불안한 조짐이 보인 것은 4경주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체불명의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경마장 상공에 나타나 전단을 살포하고 사라졌다. 전단을 주워 읽어본 사람들은 그제야 비행기가 북한군의 정찰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한의 대남선전 전단이었던 것이다. 확성기를 단 군용 지프가 휴가 중인 장병들의 즉시 귀대를 종용하고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을 했다. 그 후 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신설동 경마장에 탱크와 차량 등 군 장비를 은닉했고, 신설동 경마장은 미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다. 신설동 경마장에 있던 경주마 200여두도 인민군에게 끌려가 군수물자를 수송하다가 한미 연합군의 포탄 세례를 받고 대부분 죽고 말았다.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연합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한 후 마사회 임직원들이 신설동 경마장을 찾았을 때는 말들이 전부 사라지고 금고는 텅 비고 건물은 참혹하게 부서져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사회는 그 해 10월 30일 이사회를 열고 경마를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0월 중순께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어 1·4 후퇴를 맞으며 경마장에 잔류했던 임직원들은 또 다시 피난길에 올랐고 경마는 긴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4월부터 미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됐고 부산경마장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 부산 기지사령부가 됐으며 연지동에 신설한 부산 제2경마장도 전쟁 발발 직후 미군에게 징발됐다. 해방 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구경마장도 1950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고 경주목장은 건물과 토지를 UN군이 차지했다. 군산경마장은 미군의 폭발사고로 건물이 소실된 채 방치되다가 인근 주민들이 무단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바람에 농지로 탈바꿈했다. 경마사업이 유일한 사업소득인 마사회로서는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만이 유일한 활로였던 한국마사회는 1953년 초부터 뚝섬경마장 건설을 다시 추진하여 그해 7월 28일 착공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 날이었다. 마사회는 불용토지와 사택을 매각하여 공사비를 마련했으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하여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1954년 5월 8일, 뚝섬 서울경마장이 개장하며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중단된 경마가 만 3년 11개월 만에 재개됐다. 마사회 비상계획팀 정찬권 팀장은 “마사회는 전쟁 발발 시에 말과 시설을 보호하여 종전 후에 경마를 정상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체계적인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은 경마산업을 붕괴시키고 말과 인간 모두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소은 기자 luckysso@joongang.co.kr 2013.06.2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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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60주년…마사회는 6.25를 어떻게 겪었을까

올해로 한국전쟁이 정전 60주년을 맞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3년 1개월 간 계속되다가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을 맺으며 일단락됐다. 6·25같은 전쟁이 또 한번 발발한다면 1500마리의 경주마가 생활하고 있는 서울경마공원은 어떻게 될까. 전쟁 발발과 동시에 마사회 직원들은 충무계획에 의거 비상소집, 전시 마필보호, 직장 민방위대 운영 등 일련의 조치에 들어간다. 경마는 중단되고 경주마와 관련 장비들은 군수 물자로 소집되게 된다. 마사회는 이런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계획팀’이라는 조직도 운영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감행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신설동 경마장에서는 일요경마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시행했다. 불안한 조짐이 보인 것은 4경주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정체불명의 프로펠러 비행기 한 대가 경마장 상공에 나타나 전단을 살포하고 사라졌다. 전단을 주워 읽어본 사람들은 그제야 비행기가 북한군의 정찰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한의 대남선전 전단이었던 것이다. 확성기를 단 군용 지프가 휴가 중인 장병들의 즉시 귀대를 종용하고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을 했다. 그 후 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신설동 경마장에 탱크와 차량 등 군 장비를 은닉했고, 신설동 경마장은 미 공군의 집중 폭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다. 신설동 경마장에 있던 경주마 200여두도 인민군에게 끌려가 군수물자를 수송하다가 한미 연합군의 포탄 세례를 받고 대부분 죽고 말았다.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연합군이 수도 서울을 수복한 후 마사회 임직원들이 신설동 경마장을 찾았을 때는 말들이 전부 사라지고 금고는 텅 비고 건물은 참혹하게 부서져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사회는 그 해 10월 30일 이사회를 열고 경마를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0월 중순께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어 1·4 후퇴를 맞으며 경마장에 잔류했던 임직원들은 또 다시 피난길에 올랐고 경마는 긴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신설동 서울경마장은 1951년 서울 재탈환 후 4월부터 미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됐고 부산경마장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 부산 기지사령부가 됐으며 연지동에 신설한 부산 제2경마장도 전쟁 발발 직후 미군에게 징발됐다. 해방 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구경마장도 1950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고 경주목장은 건물과 토지를 UN군이 차지했다. 군산경마장은 미군의 폭발사고로 건물이 소실된 채 방치되다가 인근 주민들이 무단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바람에 농지로 탈바꿈했다. 경마사업이 유일한 사업소득인 마사회로서는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새로운 경마장의 건설만이 유일한 활로였던 한국마사회는 1953년 초부터 뚝섬경마장 건설을 다시 추진하여 그해 7월 28일 착공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진 다음 날이었다. 마사회는 불용토지와 사택을 매각하여 공사비를 마련했으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하여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1954년 5월 8일, 뚝섬 서울경마장이 개장하며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중단된 경마가 만 3년 11개월 만에 재개됐다. 마사회 비상계획팀 정찬권 팀장은 “마사회는 전쟁 발발 시에 말과 시설을 보호하여 종전 후에 경마를 정상적으로 복원하기 위한 ·체계적인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은 경마산업을 붕괴시키고 말과 인간 모두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소은 기자 luckysso@joongang.co.kr 2013.06.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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