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오세르 정조국, 결혼과 함께 ‘슬럼프 6년’ 날리다
2001년 대통령금배 고교축구대회 결승전이 열린 동대문운동장. 팬들과 축구관계자들은 프로 입단 최대어라는 금호고 3학년 고창현(27·울산)의 플레이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그 때 본부석 아래 벤치 뒤편에 팔짱을 낀 채 경기를 지켜보던 키 큰 선수가 있었다. 대신고 2학년이던 정조국(26·서울)이었다. 결승전이 끝난 뒤 열리는 시상식에서 득점상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팀은 이미 8강에서 탈락했지만 4경기에서 9골을 넣었다. 결승전에서 득점왕 순위가 뒤집힐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정조국은 그 해 37경기에서 44골을 넣었다. '초고교급'이란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정조국은 아직 스물 여섯이다. 여러 매체에 굵직하게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게 10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 대표팀에서 그를 위해 보장된 자리는 없다. 그만큼 일찍 떴고 시련이 길었다. 그리고 2010년 정조국은 다시 태어났다. 정조국은 2002 월드컵을 벤치에서 직접 경험했다.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의 눈에 띄어 '참관 멤버'로 발탁됐다. 2002년 수원 삼성이 고창현을 영입하자, 이에 질새라 서울(당시 안양 LG)은 이듬해 정조국 영입쟁탈전에서 승리했다. 프로 첫 시즌 정조국은 12골 2도움을 기록했다. 신인왕은 그의 차지였다. '차세대 킬러'로 미래는 탄탄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2004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득점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거의 해마다 부상에 시달렸다. 큰 키(186㎝)에 유연성까지 겸비한 타고난 자질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됐다. 그에겐 '재능은 대단하나 의지가 부족하다'는 오명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해 탤런트 김성은과 결혼했다. '헛바람 든 한물 간 스타'의 이미지는 더 강해졌다. 하지만 결혼은 정조국 축구인생의 그래프를 바꿔놓는 변곡점이 됐다. 올 시즌도 전반기까지 부진했다. 4월 2경기 연속골을 넣었지만 부상이 찾아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냥 쓰러지지 않았다. 월드컵 휴식기 동안 몸을 추스른 뒤 후반기 대반전에 성공했다. 8월 말 얻은 아들의 힘이 컸다. 정조국은 8월 21일 강원 FC전에서 4개월 반 만에 골맛을 봤다. 전날 득남한 뒤 "아들에게 꼭 선물하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 출산 현장을 지키느라 잠을 3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어느 때보다 힘이 난 그였다. 정조국은 이후 13경기에서 8골을 넣으며 서울이 10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정조국은 "멘털의 중요성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하지만 아들을 본 뒤 몸으로 느꼈다. 예전에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아들은 복덩이"라고 기뻐했다. 부인 김성은은 빠르면 봄부터 현지에서 내조할 계획이다. 지쎈 측은 "아직 아이가 어리다. 겨울에 프랑스를 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당분간은 정조국 선수가 혼자 지낼 계획"이라고 전했다. 김성은은 현재 출연하던 방송이 끝나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인터넷 패션몰을 운영하며 사업가 활동도 하고 있다. 득남과 프로 첫 우승의 기쁨은 대표팀 발탁으로 이어졌다. 조광래 대표팀 감독은 1월 아시안컵을 앞두고 13일부터 소집한 서귀포 훈련 멤버에 정조국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조 감독은 2003년 안양 LG 시절 감독 시절 정조국을 영입한 스승이다. 뒤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정조국 앞에는 병역의 의무가 기다리고 있다. 상무에 입대하려면 내년 말이 마지노선이다. 정조국은 "어렵게 찾아온 해외진출 기회를 살리고 싶다. 경찰청을 가더라도 시간을 갖고 유럽 무대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의욕을 불태운다. 실업리그 소속인 경찰청 입대까지는 2년 반이 남아 있다. 장치혁 기자 [jangta@joongang.co.kr]
2010.12.13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