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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②] "창작과 날조 사이" 이준익 감독 밝힌 역사물의 가치

'명장'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줄줄이 컴백을 준비 중인 1000만 감독 중 가장 먼저, 믿고보는 사극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2021년 극장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게 될 한국영화 '자산어보'다. '동주'에 이어 흑백의 미(美)를 담아냈고, 잔잔하면서 강단있는 힘으로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될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물에 대한 예민함과 민감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기. 애초 창작의 범위와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은 물론, 가르칠 수 있는 이준익 감독 입장에서는 날조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고증과 수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연한 과정이 당연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산어보'는 영화적 창작물이라는 정체성 아래 교과서에도 담지 못한 역사물의 가치까지 충분히 이행한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건강한 사회'를 같은 목표로 다른 뜻을 펼쳤다. 영화에서는 그 중심에 창대가 놓여있고. "창대라는 인물은 성리학의 집단, 공용체라 표현할 수 있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로 건강한 수직사회를 염원했다면 정약전은 수평사회를 지향했다. 그 무엇도 나쁘지는 않다. 수직사회도 좋은 사회다. 각 집단의 힘이 있다. 다만 현실에서는 집단의 명분을 위해 개인이 희생당하는 이슈들이 있어 문제인 것이다. 수직사회의 건강함 속에서 수평사회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창대의 여정을 통해 조선사회를 관통하고자 했다. 서학은 사실 핑계다.(웃음)"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숙제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엄~청 좋아진거지. 집단사회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독재, 공산주의는 사실상 없어지지 않았나. 대한민국은 개인주의 사회가 보편화 됐다. 지금은 더 나은 수평사회를 위해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이건 건강한 몸살이다. 이 정도의 몸살도 앓지 않고 어떻게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겠나. 난 좋다고 본다." -창대는 '자산어보'의 서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본문에서도 언급은 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그럼에도 정약전과 나란히 등장시켰다. "내가 이야기를 짜는 방식 중 하나다. 윤동주를 드러내려면 윤동준의 위인전을 그려서는 윤동주가 선명해지지 않는다. 추상적으로 표상화 될 뿐이다. 송몽규라는 인물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교 가치가 생긴다. 송몽규가 뚜렷할 때 윤동주도 선명해진다. 가네코 후미코를 다뤄야 박열이 보이는 것처럼, 창대를 그려야만 정약전이 더욱 돋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가치관을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데, ''목민심서'는 무조건 좋은 책이야!'라고 하는건 막연하지 않나. 상대 가치를 대입함으로서 진짜 가치가 보이는 것이다.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고 하면 대부분이 '들어봤어!'라면서 익숙해 할 것이다. 그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은 어떤가. 낯설지. 사실 삼강령·팔조목이라고 이 여덟조목이 한 문장인데 우리는 반만 보고 살았다. 그건 조선의 성리학이 그 쪽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는 그 반만 다뤘다. 하지만 가장 앞의 격물이 중요하다. 물건에 격을 부여한다. 영화로 따지면 짱뚱어에 격을 부여한다,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팔조목의 단계이자 성리학의 기초다. '목민심서'도 성리학, '자산어보'도 성리학이다. 결국 같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서학과 성리학은 벗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약전의 근대성이다. 약용은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수학적인 부분을 발휘하며 실천적 근대성을 보여줬다. '목민심서'와 '자산어보' 둘을 놓고 이야기 하자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으로 비교해볼 수 있다. 대칭을 통해 상대를 드러내는 방식이 이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드러내기에는 가장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고, 습득하고, 현실로 나서는 것이 창대다. 무엇보다 창대라는 인물은 수평사회를 지향하는 정약전의 세계를 소개하기 최적의 인물이다. 엄청난 신분 사회에서 일개 어부가 한 말을 이름까지 서문과 본문에 넣을 정도면 정약전이 어떤 수평사회를 바랐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은 '창대가 말하였다'고 꼬박꼬박 꼭 넣었다. 그 이름을 안 넣는다고 문제가 될까? 서문에서까지 언급했다는건 그야말로 공동저자라는 뜻이다." -역사물을 다룰 땐 왜곡과 창작의 경계를 가장 민감하고 예민하게 따져야 한다. 왜곡이 되는 순간 어떤 의미를 담았든 작품은 작품성을 잃기 마련이다. 준비 과정에서 많은 자문을 구했을 것 같은데. "'자산어보'를 번역한 정명현이라는 저자에게 시나리오를 줘 고증과 관련된 50 몇 군데를 지적받아 수정했다. 또 '현산어보' 이태원 작가에게도 시나리오를 보내 수 십군데를 지적 받았고 수정했다. 물론 고증의 뜻을 100% 수용하지는 않았다. 영화적 허용이라는 절충점이 있으니까. 대표적인 예가 짱뚱어다. 짱뚱어는 사실 흑산도에는 없는 어류다. 뻘에 사니까. 이태원 작가는 '흑산도에는 짱뚱어가 없으니까 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영화적 허용치로 쓰여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작명을 다룸에 있어 짱뚱어보다 멋진 어류는 없더라. '흑산도에는 없으나 '자산어보'에는 있다. '자산어보'는 근해 생물을 모두 다뤘으니 영화적 허용치로 쓰겠다'고 말했다. 학자는 사실에 입각한 자문을 해주는 것이 당연하고, 영화를 찍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고증에서 빗겨가지 않는 선에서는 합리성을 따질 수 있다. 창대도 이름만 있는 인물이다. 적절하게 다루면 시비를 걸 수 없다. 창작으로 허용이 되는 인물이자 창작의 권리인 것이다. 정약전이 유배 생활동안 흑산도에서 어떤 여인과 살림을 차려 아들 둘을 낳았다는 것은 팩트다. 하지만 그 여인이 가거댁으로 불린다는건 내가 붙였다. 기록에는 이름이 없다. 가거댁의 뜻에 대해 주루룩 말하는데 그럴 듯 하더라. 창작의 여지는 딱 거기까지, 비워진 지점에서만 채워야 한다." -왜곡과 날조에 몸살을 앓은 사극들이 그간 상당히 많았다. 실시간으로 나오는 이슈들도 있다. "창작의 범위에서 역사를 고증할 땐 두 가지 길이 있다. 왜곡과 날조. 왜곡은 경계가 있다. 원래 있는 것을 없는 면으로 조금 틀어보는 것이다. 창대는 엄밀히 따지면 왜곡이다. 하지만 날조는 아니다. 날조는 허용의 모든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하면 안된다. 관객들이 알아채 준다면 더욱 반가울 장면이 있다.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고 외친 창대가 전혀 다른 현실을 눈 앞에서 맞닥뜨리는 순간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 말도 안되는 세금 핍박으로 자신의 양물을 거세하는 신. 정약용이 직접 쓴 실제 시 '애절양'을 장면으로 바꾼 것이다. 그건 창작이 아니라 차용이다. 도탄에 빠진 민생 폭도를 개선하고자 하기 위해 쓴 것이 '목민심서'인데, 관리의 삶, 백성의 진짜 삶은 달랐다. '어머, 그게 시였어?' 하는 순간 평생 정약용의 '애절양'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물에서는 그런 것들을 알려줘야 하고 공부해야 한다." -n차 관람을 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뭐 의도하지는 않았다만…. 하하. 한번 보면 30%, 두번 보면 60%, 세번 보면 90% 알게 되는 영화라고 하더라. 어떤 이들은 '애절양' 장면을 보면서 '뭐야, 왜 갑자기 저 이야기가 클라이막스처럼 나와. 이준익 감독은 꼭 저렇게 한번씩 삐끗하더라' 할 수도 있다. 어떻게 보든 상관은 없다. 관람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내가 얼마나 보고싶은대로 봤나, 보여지는대로 보지 못하는 탁한 눈을 가졌나'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영화에는 정약용이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거댁이 하는 장면도 있다. 그건 초등학교 만화 참고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그만큼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숨은 표현들이 꽤 많다. 이것저것 재미있게 즐겨 준다면 창작자로서는 더는 바랄 것이 없다." -정약전은 초반 어류도감을 쓰겠다고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글로 풀어냈다. "'해족도설로 하려다 자산어보라 이름 지었네'라고 한다. 해족도설. 그림 도(圖) 자가 쓰이니 그림이 있어야 마땅하다. 원래 그리는 장면도 있었고 찍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다. 창대가 '물고기입니까, 머슴입니까!' 할 때 정약전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신이었는데, 그것까지 넣으면 너무 TMI에 방해가 될까 빼버렸다. 달시 파켓이 연기한 그라몽 신부 장면도 통편집 됐다. 이승훈이 북경 북성단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는 장면도 찍었는데 잘라냈다. 달시 파켓에게 전화해 '미안하다'고 했다.(웃음) 여건이 되면 따로 공개할 생각이다." 조연경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2021.03.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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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①] 관객의 벗이 될 흑백 걸작 '자산어보'

'명장'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줄줄이 컴백을 준비 중인 1000만 감독 중 가장 먼저, 믿고보는 사극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2021년 극장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게 될 한국영화 '자산어보'다. '동주'에 이어 흑백의 미(美)를 담아냈고, 잔잔하면서 강단있는 힘으로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될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물에 대한 예민함과 민감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시기. 애초 창작의 범위와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은 물론, 가르칠 수 있는 이준익 감독 입장에서는 날조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고증과 수정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연한 과정이 당연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자산어보'는 영화적 창작물이라는 정체성 아래 교과서에도 담지 못한 역사물의 가치까지 충분히 이행한다. -시사회 후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의미있는 반응도 다양하다. "이 영화는 결과에 대해 예측하기 힘든 영화다. 만들어 놓고도 나 역시 '어떻게 봐주실까' 싶더라. 공식 언론시사회는 잘 넘겼고, 개봉하면 이제 일반 관객 분들이 봐 주실텐데, 사전 시사로 살짝 지켜본 바로는 생각보다 아주 쉽게 영화를 보더라. '만드는 사람은 어렵게 공부해서 관객들에게 쉽게 전달하는게 최고구나' 싶었다. 일단 다행이다. 한시름 놨다." -사실 인물, 소재, 이야기 등을 놓고 보면 접근이 쉬운 영화는 아니다. "맞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간의 관계성에서 나오는 여러 감정과 여정을 통해 쉽게 읽히지만, '진짜 제대로 이해했나? 다 알아 들었나?' 생각하면 물음표가 뜰 것이다. 영화는 신분 사회에서 개인적인 처지, 그로 인해 내제된 욕망, 이탈된 가치관 이런 것들이 두루두루 여기저기 막 퍼진데 있어 그걸 하나씩 주워 먹게 만든다. 대표적으로 창대 대사 중에 '자산어보의 길을 가지 않고,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는 말이 있다. 들리기는 잘 들리는데 사실 그 유명한 '목민심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사람? 몇 없다. 이상한 책이다.(웃음) '자산어보'? 더 모른다. 근데 설명까지는 못해도 대충은 알겠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에 동화돼 흘러가듯 봐 주시기를 바랐다." -언제부터, 어떻게 생긴 호기심인가. "과정을 설명하자면 꽤 긴데, 동기는 '조선의 근대'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조선의 근대를 설명해봐라. 조선은 언제부터 근대적 시점이었냐'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갑오개혁이다', 누구는 '동학혁명 아니냐', 최근에는 식민지 시절을 근대화라고 꼽기도 한다. 개인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르고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건 집단 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21세기에 와서는 틀린 관점이다. 21세기는 개인주의 시대다. 그럼 개인주의 시대에서 근대에 접근하는 관점은 어떻게 따져냐 하냐. 말 그대로 개인에서 찾는 것이다. 개인의 근대성을 찾아가다 보니 동학이 보였다. 가장 많은 개인들이 개인들의 의견을 결집한 것이 동학이다. 권력이 모인 것이 아니니까. 프랑스 혁명처럼 성공했으면 됐을텐데 그렇지는 못했다. 동학을 파헤치다보니 '동학이 왜 동학이지?'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쫓아가니까 앞에 서학이 있었다. 그리고 더 앞으로 가면 북학이 있다. 청나라 학술과 문물, 기술을 배우려고 한 학풍이다. 정약용·정약전의 선배격이다. '그 찰나의 시절에도 역동적인 근대의 이동이 있었겠구나' 나도 찾아가 대충 추측한 것이지 정확하지는 않다.(웃음) 다만 접근해 볼 수 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을 주목했다. "아주 초창기에는 정약전도 아닌 조카사위 황서영에게 관심이 갔다. 그가 쓴 백서를 읽으면 피가 끓는다. 만 몇 자 되는데 폐부를 찌르는 글이다. 그 글을 쓰다 잡힌 곳이 충북 제천의 황서영 토굴이다. 실제로 찾아갔다. 그 곳에 계신 신부님에게 황서영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당시에는 다른 작가님과 줄거리를 잡아갔다. 근데 내가 아직 그것들을 다루기에는 준비가 안 됐더라. 옆으로 내버려두고 '사도' 찍고 '동주' 찍고 뭐 찍고 하다가 '변산'에서 미끄러지면서 '초심으로 돌아가자~' 싶어 접어뒀던 인물을 꺼내들었다." -최초의 기획은 '사도' 이전이었던 것인가. "그렇다. '사도' 전에 준비를 하다가 '사도'를 먼저 찍게됐고 '사도' 후반작업을 하면서 '동주'를 찍었다. 그리고 바로 '박열'로 넘어갔다. '자산어보'가 나오기까지 시간은 꽤 걸렸지만 그 또한 시기에 따른 영화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결국에는 황서영이 아닌 정약전이 주인공이 됐다. "황서영이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하하. 황서영 옆에 정약전이 있더라. 그리고 '자산어보'를 보며 창대를 발견했다. 그것이 긴 여정의 끝이었다. 창대가 존재했기에 이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약용을 다룬 것이 아니니까 특히 더. 정약용은 또 너무 오래 살았다. 18년 유배 생활이 끝난 후에도 18년을 더 살았으니까. 정약용은 대하 사극 드라마로 만들어야 한다. 영화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가 적합할 것이라 판단했다. '목민심서'와 '자산어보'를 쓴 정약용과 정약전의 가치관, 그 사이에서 창대가 성장하면서 부딪치는 이야기가 이 시나리오의 시작이었다." 조연경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2021.03.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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