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41>
안토니오 이노키와 숙명의 첫 경기를 펼친 1960년은 아마도 일본 전후에 일본에 얽히고 설킨 문제들이 과포화 상태까지 다다른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5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미국에의 일본 종속을 강화하는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도쿄대생 간바 미치코가 경찰과 충돌, 국회 안에서 사망했다. 그 뿐만 아니다. 일본 노동계의 미이케 투쟁, 일본 사회당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 대형 사건이 신문을 도배했다. 세계적으로는 로마올림픽이 열렸던 해였다. 또 존 F 케네디가 미대통령에 당선됐고 컬러 텔레비전이 처음으로 판매됐다. 컬러 TV 시판은 프로레슬링 흥행의 신호탄이나 다름 없었다. 스승 역도산은 이런 일본 사회의 변화를 읽고 사업 수단에 활용했다. 스승은 레슬러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을 펼쳤다. 프로 레슬러로서 거친 싸움 노선을 폈던 스승은 자신과 다른 유형의 젊은 레슬러들을 경쟁시켜 누가 경쟁에서 이길지 흥미롭게 지켜 보며 그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마침내 1960년 9월30일 도쿄 다이토 체육관에서 그것을 테스트하는 경기가 치러졌다. 이날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은 훗날 일본 레슬링의 판도를 좌지우지 했던 레슬러들이었다. 그때 난 이노키와 숙명의 한판 대결을 벌였다. 이노키는 스피드와 투지가 넘쳤지만 레슬링 입문 겨우 6개월에 지나지 않아 기술은 약간 떨어졌다. 공이 울리자 그는 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러나 별로 위력적이지 않았다. 난 재빨리 빠져나와 역기술을 시도하며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에게 다리 걸기를 시도 매트에 눕힌 후 위에서 눌렀다. 이노키의 거친 숨소리라 귓가에 들렸다. 그는 '이얍'하는 기합 소리를 내면서 투지를 불살랐다. 그의 눈빛이 내가 선배가 아니고 링에서 쓰러뜨려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나의 누르기에서 빠져 나온 그는 팔 꺾기를 시도했다. 경기는 엎치락 뒤치락 했다. 난 경기를 일찍 끝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경기를 좀 더 끌었다. 그는 첫 시합이라 노련미가 역시 떨어졌다. 마치 곡예사처럼 튕기기만 할 뿐 본격적인 기술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가 시간이 지나니 박력도 없어졌다. 이노키와의 첫 대결은 시합이라기 보다는 사나이들의 의지를 건 결투를 스승이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격정·흥분·광포·아수라장으로 대비되는 레슬링 시합과는 달랐다. 이노키는 어깨 부딪치기를 감행하며 힘을 썼다. 그것이 먹혀 들지 않자 곧 때리고 발로 차면서 나를 화나게 했지만, 나는 맞아도 흥분하지 않았다. 난 힘을 낭비하는 밀어치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착실히 정공법으로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이노키 허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를 집중공격했다. 보디슬램·꺾기·당수를 날리면서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의 기력이 한계가 왔음을 느꼈다. 난 그의 몸을 덮쳤다. 심판의 카운터에 그는 몸을 밀치지 못했다. 7분6초만에 나의 승리이자 이노키의 패배였다. 매트에서 일어난 이노키는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나 역시 첫 경기에서 패했을 때 얼마나 낙담했는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우린 거의 동시에 라커로 들어갔다. 이노키는 별말이 없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잘 싸웠다"며 악수를 건넸지만 그는 '픽'웃고만 말았다. 그날 경기에는 또 한명의 전설적인 레슬러가 데뷔전을 치렀다. 키 216㎝. 올드팬들에게 낯익은 얼굴일게다.
2006.06.20 0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