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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단풍놀이처럼 '단체관광' 붐 일었던 부산경마장 깊은 여운

부산경마장은 이웃주민들이 기차 타고 단체관광을 올 정도로 경마 도입 초기에 호황을 이뤘다. 1925년 조직된 사단법인 부산경마구락부는 1927년 설립인가를 받았고, 1930년 11월 18일 당시 부산 교외였던 동래군 서면 범전리에 면적 약 4만8000평, 1000m 규모의 주로를 갖춘 경마장을 준공했다. 준공에 이어 11월 22~26일, 12월 2~3일에는 추계경마를 개최하며 ‘서면경마장’ 시대를 열었다. 이 기간 마권발매 규모는 18만6280장, 마권매상이 37만2560엔으로 9개 공인경마장 중 서울(경성)에 이어 2위를 기록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부산경마장은 전국 9개 공인 경마장 중 서울을 제외하고 가장 큰 관람 인파를 끌어 모은 경마 도시였다. 출전 마필의 수도 1927년 99두, 1928년과 1929년 각 176두, 1930년 299두로 점차 증가했다. 서면경마장이 들어서기 전에도 부산의 경마는 여러 장소에서 열렸다. 초량역(구 부산역) 근처 해안 매축지(매립지), 연산리, 동래온천장 입구, 조선방직 광장에서도 경마가 개최됐다. 대부분 근처에 하천이나 연못이 있고 철도역과도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매년 봄과 가을에 열린 부산 경마는 인근 지역민의 장거리 여행까지 유발했다. 1924년 경북 밀양의 독자 대상으로 부산의 추계경마 관광객을 모집하는 신문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10월 19일 당일 오전 8시에 밀양역을 출발, 오후 9시에 돌아오는 일정이며 차비 1원50전을 내면 당일 중식비는 지국에서 부담해 준다는 내용이다. 1930년부터 부산경마는 공인 ‘서면경마장’의 시대로 접어든다. 주목할 점은 흔히 ‘서면경마장’이라고 일컫는 장소가 실상 3개의 경마장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우선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현재 부산시민공원 내에 뚜렷한 주로 형태가 남아 있는 부산진구 범전동 64-3에 해당하는 제1 서면경마장이다. 이곳은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군 기마부대, 1941년에 태평양전쟁으로 병참경비대, 1942년에는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한 임시군속훈련소, 다시 일본군 군수품 야적장으로 활용되는 수난의 역사가 혼재된 장소다. 1945년 9월 29일 미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제1, 2 서면경마장은 ‘하야리아캠프’라 불리는 주한미군 기지로 탈바꿈한다. 1946년 제1 서면경마장 동쪽의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연지동 130번지 일대에서 국군이 사용하던 국유지를 임대해 임시시설을 갖추고 경마를 재개했다. 이곳이 바로 제2 서면경마장이다. 끝으로 부산경마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3 서면경마장의 등장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해 뒤인 1956년 봄, 하야리아부대 동쪽 부산진구 범전동 산 2번지 일대 골짜기를 깎아 길이 360m 미니 트랙을 설치하고 경마를 열었다. 1957년 여름까지 부산에서 마지막 경마를 시행한 장소였기 때문인지 제3 서면경마장터에는 목욕탕, 방앗간, 식당 등 상점과 도로에 경마장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김두용 기자 kim.duyong@joongang.co.kr 2021.12.17 06:39
스포츠일반

[발굴! 한국경마비화 ④] 우리나라 최초 경마법인, 조선경마구락부

1922년 4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시행 법인인 조선경마구락부(朝鮮競馬俱樂部)가 설립인가를 받았다. 1920년대에는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를 본받아 전국에서 경마구락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20여개를 헤아렸다. 하지만 설립 인가를 받은 경마구락부는 전국 6도시에 6구락부뿐이었다. 인가받은 구락부는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 평양의 평남(平南)레이스구락부, 대구의 대구경마구락부, 신의주의 국경경마구락부, 부산의 부산경마구락부, 군산의 군산경마구락부다. 처음 약 10년간은 법인구락부의 인가만 제한할 뿐 경마의 개최를 통제하거나 단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임의단체가 경마를 시행해도 아무런 제약이 없는 &#39자유방임 경마&#39의 시기였다. 그러다가 30년대에 접어들어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군마의 수요가 급증하자 마필 자원의 확보를 위해 수립된 &#39조선마정제1기계획&#39에 따라 최초의 경마 법규인 조선경마령이 제정 공포됐다. 조선경마령의 시행으로 경마는 사단법인 경마구락부만 개최할 수 있었고 1933년에는 전국의 경마구락부를 조정·통제하는 사단법인 조선경마협회가 설립됐다. 1937년에는 함흥·청진·웅기의 3개 경마구락부가 신설돼 9개 도시에서 경마가 시행됐다. 조선경마협회는 1942년 조선마사회로 시행체가 단일화되기까지 약 10년간 경마계를 이끌었다.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1942년 조선마사회령의 공포와 함께 전국의 경마구락부가 조선마사회로 단일화됐다. 조선마사회는 조선경마협회와 조선경마구락부 직원을 흡수하여 조직을 꾸렸으며 각 경마구락부로부터 전국의 경마장을 인수했다. 조선마사회가 인수한 경마장은 서울의 경성경마장을 비롯해 부산·대구·군산·평양·신의주·함흥·청진·웅기의 9개 경마장이었다. 8.15 해방과 함께 조선마사회는 나명균 씨 등 한국인 승마 애호가들에게 인수됐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 8일 조선마사회를 인수하는데 앞장섰던 나명균 씨를 초대회장으로, 이창래 씨를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조선마사회는 이후 1949년 한국마사회로 회명을 개칭했는데, 한국마사회는 회명을 개칭한 9월29일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박수성 기자 ▷ 백범 김구, 주말마다 경마장 찾았다▷ 우리나라 근대경마의 시발점, 전선경마대회▷ 6.25 한국전쟁 시절에도 12경주 모두 시행▷ 우리나라 최초 경마법인, 조선경마구락부▷ 주산 1급 포진…60년간 주판으로 배당률 집계▷ 50년간 빚더미 위에 달린 한국경마▷ 최초의 장외발매소는 ‘귀로 듣는 경마’ 2009.04.1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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