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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명은 냉장고, 1명은 쓰레기속...여수 두살배기 쌍둥이 비극

“2살 아이도 얼굴 한 번 보질 못했어요. 살아남은 아이도 쓰레기 더미에서 지내온 거죠.” 1일 전남 여수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주민들이 중앙일보 취재진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은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 이면의 또 다른 아동학대 정황이다. 지난달 27일 이곳 가정집에서 생후 2개월 된 영아 시신이 냉장고에 2년 동안 보관돼 온 사실이 드러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 생존 쌍둥이 정체 숨겨 온 엄마 어머니 A씨(43)의 엽기적 행각은 지난달 6일 한 이웃 주민이 “아랫집에 쓰레기가 방치돼 있고 아이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있다”고 신고하면서 드러났다. 아동학대 정황이 드러나자 전남 여수경찰서와 여수시는 지난달 20일 7살 아이와 2살 아이를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 보내 어머니와 분리조치 했다. A씨 집에서 치운 쓰레기만 5t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은 냉장고 속에서 발견된 영아가 2년 동안 방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웃 주민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7살, 2살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크다고 했다. A씨는 숨진 아이뿐만 아니라 그와 쌍둥이로 태어나 멀쩡하게 살아 있는 2살 아이의 존재도 주변에 숨겨왔다고 한다. 첫째 아이에게 종종 밥을 먹여왔다는 한 주민은 “7살 아이가 지난해부터 동생이 있다는 말을 이따금 해왔는데 올해 5~6월쯤 A씨에게 동생의 존재를 물었더니 본인 아이가 아니고 아픈 사촌 동생을 대신 돌봐주고 있다면서 숨겼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A씨가 외출할 때도 7살 아이만 동행했고 2살 아이와 함께 다니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 첫째 아이 “집에 아픈 동생 있는데…” A씨가 2살 아이의 존재를 숨겨도 주민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 했다. 첫째 아이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때 “나도 동생이 있다. 앉지도 걷지도 못하는 아픈 아이가 있다”는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동보호기관에 맡겨진 2살 아이는 걸음마는 뗐지만 걷는 것을 심하게 거부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A씨는 여수시와 아동보호기관 직원들이 방문했을 때마다 집 내부를 공개하는 것을 매우 꺼렸고 복도로 나와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A씨는 지난달 20일 아동보호기관 직원이 경찰관을 대동하고 방문하자 현관문을 열어줬다. 지난달 25일 관할 동사무소 직원이 A씨의 집을 청소했을 때 찍은 사진에서는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 할 정도로 쓰레기가 집 안에 가득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 엄마 대신 아이들 돌봐 온 주민들 관할 동사무소 직원은 “A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먹을만한 음식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A씨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주민들이 대신 챙겨주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한 주민은 “2살 아이를 목격한 유일한 이웃이 있는데 너무 심하게 울고 있어서 A씨 집으로 가 아이를 데려와서 씻겨줬다. 기저귀를 벗기자 오물이 심하게 말라붙어 있을 정도로 방치됐었다”고 전했다. A씨는 2살 아이의 출생신고나 영아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A씨가 2018년 5월 현 주소지로 전입신고를 했지만, 일정한 소득이 있었기 때문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분류되지 않아 동사무소가 숨지거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아이들이 방치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냉장고 속 영아 시신의 발견도 쌍둥이 존재를 의심한 이웃 주민의 계속된 신고가 아니었으면 계속 묻혀 있을뻔했다. ━ 부검 결과 “외부 손상 없어” 여수경찰서는 A씨를 아동학대 혐의로 구속하고 2개월 영아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 중이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영아의 사인 확인을 의뢰했는데 1차 부검 결과 폭행 등 외부 손상 흔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최종 부검 결과는 2개월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A씨를 상대로 왜 냉장고에 영아 시신을 방치했는지 정확한 사건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여수=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2020.12.02 08:28
연예

[청춘은 맨발이다-117] 선우휘와 김지하

이만희 감독·신성일 주연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년). 신성일(왼쪽)은 이 영화의 강원도 인제 촬영장으로 도피한 선우휘·백기완 등을 만났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로 인해 필화로 쫓겨다니던 두 명의 명사를 접하게 됐다. 당대의 문인 선우휘(1922~86)와 김지하(1941~)다. 1973년 9월 말 강원도 인제에서 시작된 '들국화는 피었는데' 촬영은 한 달 이상 계속됐다. 어느 날 선우휘가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그를 따르는 서울대 출신 허술과 함께 인제 촬영 현장에 나타났다. 선우휘는 필화 사건으로 쫓기는 몸이었다. 소설 '불꽃'으로 유명한 그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으며, 종군기자로 6.26에 참전하고 반전과 휴머니즘이 깃든 작품들로 문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작가였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도 선우휘 원작이다. 선우휘는 자신이 직접 각색한 영화 촬영장도 구경하고, 피신할 겸해서 인제를 찾았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열호(不亦樂乎)아'라는 말이 있다. 선우휘같은 문인이 인제같은 오지로 우리를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나 역시 선우휘 작품의 반전사상에 공감했고, 이만희 감독도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려 했다. 선우휘는 쫓기는 입장이었지만 여유가 있어 보였고, 늘 잔잔한 미소가 있는 인자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 인제의 식당에서 선우휘 일행에게 뱀탕을 대접했다. 백기완은 선우휘에게 "형님의 나라는 이런 것 아닙니까"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들이 야간 촬영 현장에서 적벽돌 건물 폭파 장면을 구경하던 중, 벽돌 조각이 선우휘의 어깨를 때렸다. 진짜 TNT를 썼기 때문에 촬영 현장은 위험했다. 백기완은 "위험합니다. 우리 갑시다"라며 선우휘를 데리고 촬영장을 떠났다. 백기완은 2005년 내가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영치금 3만원을 보내주었다. 영치금으로선 최저 액수였지만 나에게 뜻깊고, 고마운 마음 씀씀이었다.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은 "백 소장이 수감생활 했을 때는 영치금 3만원이 일반적이었을 거야"라며 그 액수의 의미를 풀이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김지하는 이 감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다. 나와 함께 인제의 여관에서 '들국화는 피었는데' 콘티를 보며 배 깔고 엎드려 낄낄거리던 이 감독이 "신짱, 김지하가 말이야…"하면서 숨겨 놓은 이야기를 꺼냈다. 70년 '오적(五賊)'을 발표해 정권의 미움을 산 김지하가 이 감독의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 촬영장에서 체포된 것이다. 이 감독은 71년 무렵 흑산도 근처 작은 섬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김지하가 그리로 숨어들었다. 이 감독과 김지하는 밤새워 마음 놓고 술을 마시며 실랄하게 정권을 비판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엿들은 한 스태프가 김지하를 체제비판자로 섬의 경찰에 신고했다. 밀고자는 그 사람이 김지하인 줄은 전혀 몰랐다. 김지하는 섬에서 체포됐다가 여수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가 김지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수경찰서는 뜻밖에 대어를 낚은 셈이었다. 당시 서울대 미대대학원에 재학 중인 내 여동생 강명희과 남친 임세택은 4.19를 소재로 한 교내 소묘전을 기획했다. 서울대 문리대의 김지하가 주도하는 학생운동과 연계가 되어 있었다. 미대 학과장인 정창섭 교수가 이 계획을 당국에 사전 신고했고, 김지하 등은 모두 달아났다. 강명희와 임세택은 잡혀서 남산으로 끌려갔다. 마침 우리와 친분이 있는 한무협 장군이 남산의 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내 어머니가 한 장군에게 선처를 부탁했고, 두 사람은 다행히 남산에서 고문 없이 2주만에 풀려났다. 내가 아는 우리 역사의 뒤안길이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1.10.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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