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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운동회’ 故 변웅전 전 의원 오늘(27일) 발인…자하연에 영면 [왓IS]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 변웅전 전 국회의원이 세상과 작별한다. 27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변 전 의원의 발인식이 엄수된다. 발인 후 변 전 의원은 장지인 판교 자하연에서 영면에 든다.변 전 의원은 지난 23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혜민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 충남 서산 출신인 고인은 중앙대 심리학과 재학 중이던 1963년 중앙방송국(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방송계에 입문했다. 1969년 MBC로 이직한 뒤 예능 PD 고(故) 김경태의 발탁으로 ‘유쾌한 청백전’, ‘묘기대행진’, ‘명랑운동회’ 등을 진행하며 전국적 인기를 누렸다. 1970~1980년대에는 ‘국민 MC’로 불리며 안방 예능 전성기를 이끌었다. 최근 별세한 ‘뽀빠이’ 이상용을 ‘유쾌한 청백전’ 보조 MC로 발탁하며 연예계에 데뷔시키기도 한 고인은 이후 MBC가 설립한 제작 전문 자회사 MBC 프로덕션(현 MBC C&I) 사장을 역임했다.정치인으로도 오래 활동했다. 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고인은 1996년 제15대 총선을 시작으로 16·18대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3선 의원을 지냈다. 18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가족위원장을 맡았다. 2011년 자유선진당 대표를 맡은 것이 공식적인 마지막 정치 활동이었다.박세연 기자 psyon@edaily.co.kr 2025.11.2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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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변웅전, 누구?… 1970~80년대 ‘국민 MC’, MBC ‘명랑운동회’ 이끈 전설

1970~80년대 안방 예능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 변웅전 전 국회의원이 별세했다.24일 유족에 따르면 변 전 의원은 전날 서울 광진구 자양동 혜민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충남 서산 출신인 고인은 중앙대 심리학과 재학 중이던 1963년 중앙방송국(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방송계에 입문했다. 1969년 MBC로 이직한 뒤 예능 PD 고(故) 김경태의 발탁으로 ‘유쾌한 청백전’, ‘묘기대행진’, ‘명랑운동회’ 등을 진행하며 전국적 인기를 누렸다. 1970~1980년대에는 ‘국민 MC’로 불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최근 별세한 ‘뽀빠이’ 이상용을 ‘유쾌한 청백전’ 보조 MC로 발탁하며 연예계에 데뷔시켰다. 이후 MBC가 설립한 제작 전문 자회사 MBC 프로덕션(현 MBC C&I) 사장을 역임했다.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고인은 1996년 제15대 총선을 시작으로 16·18대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3선 의원을 지냈다. 18대 국회에서는 보건복지가족위원장을 맡았다. 2011년 자유선진당 대표를 맡은 것이 공식적인 마지막 정치 활동이었다.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이다. 발인은 27일 오전 8시, 장지는 판교 자하연이다.이수진 기자 sujin06@edaily.co.kr 2025.11.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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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명랑운동회’ 3선 변웅전 전 의원 별세…향년 85세

아나운서 출신 변웅전 전 의원이 지난 23일 별세했다. 향년 85세.연합뉴스 등에 따르면, 고인은 지난 23일 오후 서울 광진구 자양동 혜민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산농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심리학과 재학 중 1963년 중앙방송국(KBS) 아나운서가 됐다.최평웅 전 아나운서의 회고록 ‘마이크 뒤에 숨겨둔 이야기들’(2023)에 따르면 고인은 KBS 입사 후 ‘자정 대공뉴스’를 마친 뒤 술을 마셨다가 새벽 2시 뉴스에서 방송사고를 냈다. 그날 아침 장기범(1927∼1988) 방송과장이 고인을 지역 방송국으로 발령냈다.서울에서 선배들 틈에 끼어 제대로 방송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고인은 지방에서 공개방송, 좌담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며 방송 경험을 쌓았고, 1년 후 서울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돼서 1969년 MBC로 스카웃됐다. 이 때문에 고인은 장 과장을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어 준 선배’로 추앙했다. 고인은 MBC 김경태(1935∼1995) PD에게 발탁돼 ‘유쾌한 청백전’, ‘묘기대행진’, ‘명랑운동회’ 등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1995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1996년 15대 총선을 시작으로 16, 18대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3선 의원이 됐다. 18대 국회에선 보건복지가족위원장을 맡았다. 2011년 자유선진당 대표를 역임했다.유족은 부인 최명숙씨와 2남(변지명·변지석)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25일 낮 12시부터 조문 가능), 발인 27일 오전 8시, 장지 판교 자하연.강주희 기자 kjh818@edaily.co.kr 2025.11.24 16:49
연예일반

‘개그계 대부’ 故 전유성, 후배들 눈물 속 영면… “큰 별 떠났다” [종합]

‘개그계 대부’ 고(故) 전유성이 후배 코미디언들의 눈물과 박수 속에 영면했다.전유성은 지난 25일 오후 9시 5분, 폐기흉 증세 악화로 전북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6세. 장례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대한민국코미디언협회장(희극인장)으로 엄수됐다.28일 오전 6시 치러진 영결식에는 외동딸 전제비 씨가 상주로 자리했고, 김학래 협회장이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사회는 이수근, 약력 보고는 최양락이 맡았으며, 이홍렬과 김신영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표인봉은 기도를 올리며 고인을 기렸다.이홍렬은 “한국 코미디의 큰 별을 떠나보낸다”며 “무대 위 혁신가이자 무대 뒤 스승이셨던 전유성 선배님은 웃음이 사회의 공기이자 문화임을 증명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김신영은 “제 코미디를 처음 인정해 주신 분이자 어린 제자도 존중해주신 ‘나의 어른’이었다”며 “병실에서 함께한 마지막 4일은 40년보다 진실했다. 남겨주신 웃음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눈물을 흘렸다. 발인 직후 운구 행렬은 여의도 KBS 신관으로 이동해 ‘개그콘서트’ 무대를 돌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고인이 생전에 애정을 쏟았던 무대 위에서 후배들은 박수로 배웅했다. 박준형은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신 분께 마지막 무대를 바칠 수 있어 영광”이라며 “선생님 뜻을 이어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영결식에서는 김정렬이 고인이 생전 즐겼던 ‘숭구리당당’ 춤을 선보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웃음과 눈물이 함께했다.빈소에는 최양락, 이봉원, 심형래, 유재석, 강호동, 이경규, 김국진, 이영자, 조세호, 박성광, 신봉선, 이경실, 지석진 등 수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찾아와 고인을 추모했다. 배우 송승환, 가수 서수남·박상철 등도 빈소를 지켰다.1949년생 전유성은 1969년 TBC ‘쑈쑈쑈’ 작가로 시작해 코미디언으로 전향, ‘유머1번지’, ‘쇼 비디오자키’ 등으로 전성기를 열었다. ‘개그맨’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KBS ‘개그콘서트’를 기획·탄생시켜 한국 공개 코미디의 새 장을 연 인물로 ‘개콘의 아버지’로 불린다. 철가방 극장,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등 무대를 통해 후배 양성과 코미디 저변 확대에도 크게 기여했다.고인의 장지는 전북 남원시 인월면으로, 생전 국숫집을 운영하며 터를 잡았던 곳에 영면한다. 김지혜 기자 jahye2@edaily.co.kr 2025.09.28 08:40
연예일반

“나의 어른 전유성 교수님”... 김신영, 추도사 중 끝내 오열

개그맨 김신영이 스승이자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故 전유성을 향한 추도사를 읽다 결국 눈물을 쏟았다.2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故 전유성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가 장례위원회를 꾸려 희극인장으로 치른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을 비롯해 많은 후배와 동료 코미디언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사회는 이수근이 맡았고, 장의위원장인 김학래 협회장이 개·폐식을 진행했다. 약력 소개는 최양락이, 조사와 추도사는 각각 이홍렬과 김신영이 맡아 고인을 기렸다.김신영은 “나의 어른, 전유성 교수님.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제자를 넘어서 친구라고 불러주셨던 따뜻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겠다”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모든 이들이 허무맹랑하다던 아이디어를 밤새 즐거워해 주셨던 분, 아무것도 모르던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분”이라며 목소리를 떨었다.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배려하며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교수님의 모습은 결코 잊지 못한다. 병원에서의 4일이 40년보다 진실되고 진심이었다”며 “편히 주무시고, 좋아하시던 게임도 실컷 하시고, 천국에서 그리운 분들과 회포를 푸시길 바란다”고 오열했다. 김신영은 마지막으로 “다음 생에도 꼭 제 교수님으로 나타나 달라. 사랑하고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이날 영결식에는 유재석, 강호동, 지석진, 이경실, 심형래, 임하룡, 김지민 등 수많은 후배와 동료들이 조문하며 슬픔을 함께했다. 배우 송승환, 가수 서수남, 박상철 등 문화계 인사들도 고인을 추모했다.故 전유성은 지난 25일 전북대병원에서 폐기흉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장지는 생전 거주했던 전북 남원 인월면 수목장에 마련됐다.1969년 TBC ‘쑈쑈쑈’ 방송 작가로 데뷔한 전유성은 이후 코미디언으로 전향해 ‘개그콘서트’ 원안을 제공하며 공개 코미디의 새 장을 열었다. ‘유머 1번지’, ‘좋은 친구들’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한국 코미디의 뿌리를 세웠다. 또 ‘코미디 시장’을 통해 신봉선, 황현희, 박휘순 등 수많은 후배를 길러내며 ‘개그계 거목’으로 존경받았다. 김지혜 기자 jahye2@edaily.co.kr 2025.09.28 07:13
스타

故전유성은 누구?…‘개그맨’ 처음 사용, 후배양성 힘쓴 ‘참 개그맨’

‘개그계 대부’ 코미디언 전유성이 별세했다. 향년 76세.25일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에 따르면 전유성은 폐기흉으로 전북 전주 전북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증세가 악화해 이날 오후 9시 5분께 세상을 떠났다. 전유성은 급성 폐렴과 코로나19 후유증 등으로 건강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올해 제13회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명예위원장을 맡기도 한 전유성은 부대행사 ‘코미디 북콘서트’에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불참하기도 했다.1949년생인 전유성은 1969년 TBC ‘전유성의 쑈쑈쑈’를 통해 데뷔했으며 다양한 공개 코미디 무대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다. ‘유머1번지’, ‘쇼 비디오 자키’, ‘개그콘서트’,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에 출연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또한 ‘우리말 겨루기’, ‘청춘행진곡’, ‘주말 코미디 극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2001년에는 ‘전유성의 코미디시장’을 창단해 개그 지망생들의 양성교육에 힘썼다. 고인은 희극인이나 코미디언 대신 ‘개그맨’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고인은 집필 활동에도 열중해 여러 저서를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전유성의 구라삼국지’,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등이 있다.강주희 기자 kjh818@edaily.co.kr 2025.09.25 23:03
스타

부산 연극계 원로 전성환 별세…향년 85세

부산 연극계의 거목인 배우 전성환이 별세했다.1일 한국연극협회에 따르면 고인은 31일 오후 5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고인은 1940년 북간도에서 태어나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에 정착한 뒤 1963년 동생인 배우 고(故) 전승환과 극단 전위무대를 창단하며 연극계에 입문했다.영화 ‘청풍명월’(2003)을 시작으로 영화와 방송에서도 다수 출연하며 시청자를 만났다. 영화 ‘오구’, ‘활’, ‘조선적 아가씨’, 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 ‘태왕사신기’, ‘에덴의 동쪽’, ‘천추태후’, ‘제빵왕 김탁구’, ‘뿌리깊은 나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나생문’ 등에 출연했다.또한 고인은 한국연극협회 부산지회장과 부산시립극단 수석 연출,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부산 MBC 프로듀서로도 활동했다. 2001년 지역 연극인 최초로 이해랑연극상을 받았고, 부산 문화예술대상, 부산시문화상, 한국연극협회 자랑스런 연극인상, 한국예총 예총예술문화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고인의 빈소는 부산 온종합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3일 오전 9시 30분, 장지는 영락공원후 실로암이다.이주인 기자 juin27@edaily.co.kr 2025.09.01 20:28
프로야구

"최초 5인 선발제 선구자" "큰 별"...1994 LG 우승 멤버의 이광환 감독 애도

1994년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이광환 전 감독이 2일 별세했다. 최근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던 이 전 감독은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전 감독은 지난 3월 LG의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공식 석상에서 이 전 감독의 마지막 모습이다. 1994년 우승 멤버들이 이 전 감독의 별세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차명석 LG 단장은 "이광환 감독님의 부고 소식을 접해 너무 안타깝다. 감독님께서는 한국 야구에서 최초로 5인 선발제를 만드신 분이고, 아무도 하지 못했던 자율야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지도자"라고 애도했다. 차 단장은 1994년 26경기에 등판해 2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28을 기록했다. 차 단장은 "우리나라 야구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셨다"라며 "한국 야구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셨던 한국 야구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94년 류지현(현 국가대표팀 감독)·김재현(SSG 랜더스 단장)과 함께 '신인 삼총사'로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던 서용빈 LG 전력강화 코디네이터는 "우리 프로야구에서 지도자로서의 한 획을 그으시며 1994년 우승을 함께 만들어주신 감독님이셨다"라며 "올 시즌 홈 개막전 시구를 하실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셨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너무 당황스럽다. 한국야구의 큰 별이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대구중 출신의 이 전 감독은 서울 중앙고 3학년 재학 당시 고교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았다. 이후 고려대를 거쳐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1977년 모교 중앙고 사령탑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 원년인 1982년 OB(현 두산) 베어스 타격 코치에 부임해 한국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고 1986~87년 일본 세이부 라이온즈와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야구 유학을 다녀왔다. OB 사령탑을 거쳐 1992년부터 LG 감독을 맡았고, 1994년 '신바람 야구'를 앞세워 한국시리즈 정상을 이끌었다. 이후 한화 이글스와 우리 히어로즈(현 키움)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통산 성적은 608승 639패 3무. 여자야구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서울대학교가 공동으로 설립한 베이스볼 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1995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사재를 털어 야구박물관을 건립했고, 소장하고 있던 야구 관련 소장품 3000점을 모두 기증했다. KBO 육성위원장을 지내면서 국내 야구 저변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고, 2010년부터 2015년까지 KBO 베이스볼 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지도자 양성에도 기여했다.빈소는 제주 부민장례식장 6분향소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9시다. 부산=이형석 기자 2025.07.03 07:06
프로야구

'신바람 야구' 1994년 LG 우승 이끈 이광환 감독, 2일 별세

1994년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KS) 우승을 이끈 이광환 전 감독이 2일 세상을 떠났다. 이광환 감독은 자율 야구를 표방하며 LG의 신바람 야구를 이끈 감독이다. 1993년 선발-중간-마무리로 이어지는 투수 분업화를 시도하며 마운드 운용에 새 지평을 열었고, 1994년엔 류지현(현 야구대표팀 감독), 서용빈(LG 전력강화 코디네이터), 김재현(SSG 랜더스 단장) 등 신인 삼총사를 앞세워 팀을 정상에 올린 바 있다. 2000년대엔 한화 이글스 감독에 이어, LG, 우리 히어로즈 감독을 맡아 현장에서 활약했고, 이후 KBO 육성위원장, 여자야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1995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사재를 털어 야구박물관을 건립하고, 소장하고 있던 야구 관련 소장품 3000점을 모두 기증하며 한국 야구 저변 확대와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올해 3월엔 LG의 개막전 시구까지 맡으며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나, 지병(폐 섬유증)으로 인해 2일 별세했다. 빈소는 제주도 제주시 부민병원 장례식장에 준비될 예정이며 발인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윤승재 기자 2025.07.02 17:21
배구

'남자 배구 레전드' 장윤창 교수, 지병으로 별세...향년 65세

1980∼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년의 '명스파이커' 장윤창 경기대 스포츠과학부 교수가 3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장윤창 교수는 한국 남자배구 최고의 스타였다. 1978년 인창고 2학년 때 최연소(17세)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앞장섰다.이어 그해 방콕 아시안게임과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사냥을 주도했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이후 장윤창은 1983년 '조직력 배구'의 대명사인 고려증권의 창단 멤버로 참가해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함께 실업 배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프로배구의 발판이 된 대통령배 원년 대회(1984년) 때 인기 선수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최우수선수(MVP)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활약을 앞세워 고려증권은 초대 챔피언을 비롯해 최다인 6회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특히 왼손 아포짓 스파이커였던 그는 남자배구 처음으로 '스카이 서브'(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였고, 활처럼 휘어지는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타점 높은 공격으로 '돌고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장 교수가 남자 배구 '왼손 거포'의 원조로 이름을 날렸고, 이후 김세진 한국배구연맹(KOVO) 운영본부장과 박철우 우리카드 코치가 계보를 이었다.현역 은퇴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조지워싱턴대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체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모교인 경기대에서 스포츠과학부 교수로 활동해왔다. 또 대한배구협회 강화이사를 거쳐 2011년 출범한 대한민국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과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을 역임했다.장윤창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몸 관리로 유명했지만, 병마를 피해가지 못했다.고려증권 멤버였던 박주점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장은 "장윤창 교수가 작년 말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자택에서 투병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장 교수는 1980년 한국 남자배구를 풍미했던 최고의 스타였다"고 회고했다.고인의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6월 1일 오전 5시 30분 발인 예정이다.안희수 기자 2025.05.3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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