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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수 사관학교 키움의 KS 유격수 잔혹사

키움 히어로즈는 KBO리그에서 '유격수 사관학교'로 통한다. 최근 12년(2010~2012시즌) 동안 주전 유격수로 내세운 강정호(은퇴)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김혜성(키움) 세 선수가 골든글러브 8개를 차지했다. 현장 지도자들의 안목과 뚝심이 만든 성과였다. 강정호는 입단 3년 차였던 2008시즌 막판, 동기생 황재균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를 차지했다. 당시 팀을 이끌던 이광환 감독은 "강정호는 최고의 유격수가 될 선수"라고 치켜세우며 그를 붙박이 주전으로 예고했다. 후임 사령탑이었던 김시진 감독도 "공격보다 수비에 집중하라"고 강정호를 다독였다. 이후 강정호는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4번 차지했다. 2015년에는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다. 키움은 강정호가 MLB에 진출하며 생긴 공백도 잘 메웠다. 당시 염경엽 감독은 2015시즌을 앞두고 김하성을 주전 유격수로 낙점했다. 염 감독은 "강정호보다 좋은 유격수가 될 수 있는 선수다. 책임감과 간절한 마음도 크다"고 말했다. 공격력이 더 돋보였던 김하성은 점차 수비력도 좋은 유격수로 거듭났다. 2018년부터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뒤 2021년 MLB로 진출했다. 올해는 '2년 차 1라운더' 김휘집이 키움의 유격수 계보를 이었다. 그는 정규시즌 10개 구단 유격수 중 6번째로 많은 수비 이닝(798)을 소화했고, 나쁘지 않은 수비율(0.966)을 기록했다. '전임' 유격수들이 차례로 MLB에 무대에 진출한 덕분에 김휘집을 향한 관심도 높아졌다. 더불어 김휘집을 위협하는 백업 신준우도 주목받고 있다. 문제는 불명예스러운 징크스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키움은 지난 7일 SSG 랜더스와의 한국시리즈(KS) 5차전에서 4-2로 앞선 9회 말 투수 최원태가 김강민에게 역전 스리런 홈런을 맞고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앞선 8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최지훈의 평범한 땅볼 타구를 잡지 못해 출루를 허용한 신준우의 실책이 화근이었다. 투수 김재웅은 이어진 최정과의 승부에서 투런 홈런을 허용하며 2-4로 추격당했다. 실책 하나가 SSG 추격 기세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김휘집도 4일 3차전 8회 초 수비에서 송구 실책을 범했다. 키움은 투수 김동혁이 이어진 위기에서 후안 라가레스에게 투런 홈런을 맞고 1-2로 역전당했다. 강정호도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4년 KS 5차전에서 1-0으로 앞선 9회 말 야마이코 나바로의 평범한 땅볼을 다리 사이로 빠뜨리는 실책을 범했다. 키움은 이후 채태인·최형우에게 연속 안타를 맞고 1-2로 패했다. 김하성도 두산 베어스와의 2019년 KS 1차전 6-6 동점이었던 9회 말 수비에서 박건우의 뜬공을 뒷걸음질 치다가 놓치며 끝내기 패전 빌미를 내준 바 있다. 2014·2019 KS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사령탑 홍원기 감독은 "특정 선수 때문에 패한 게 아니다"라며 다독였지만, 실책에 발목잡힌 게 분명하다.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가장 뼈아픈 실책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그 무대는 KS다. 안희수 기자 2022.11.08 17:27
야구

[김인식의 클래식] 서울대 야구부는 1955년에 이미 이겼다①

서울대학교 야구부는 '백전백패'의 팀으로 기억된다.많은 사람들은 서울대 야구부가 1977년에 창단됐다고 알고 있다. 첫 승리가 2004년 9월에야 나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서울대 야구부는 알려진 것보다 더 유서가 깊고, 무엇보다 많이 이겼다. 최근 들어 알게 된 서울대 야구부의 역사를 야구 팬들에게 꼭 한 번 이야기하고 싶었다.출발점을 돌아보려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6년 자유신문사가 창설하고 조선야구협회가 공동주최한 제1회 맹호기 쟁탈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그해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경성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5개 대학 팀 가운데 ‘경제 전문' 팀과 ‘약학 전문’ 팀이 포함돼 있었다. 바로 서울대 상과대학과 약학대학 야구부의 전신이다. 두 팀 다 이 대회에선 승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울대 약대 재학생이던 서대석은 5타수 2안타(타율 0.400)를 기록해 타격 1위상을 수상했다.이듬해 열린 2회 대회에는 서울대 상대와 약대에 이어 사범대 야구부까지 참가했다. 다른 경쟁 팀은 고려대, 영남대, 성균관대 통합팀과 한양대 공과대학 야구팀이었다. 이때 약대 야구팀이 3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영남대(6-3)와 한양 공대(5-1)를 1·2회전에서 각각 꺾었다. 결승전에선 최고 명문팀이던 성균관대를 3-2로 눌렀다.이때 우승 멤버 가운데 야구 원로 한 분이 계신다. 1960년대 중반 중앙고등학교 야구부 감독를 맡았던 이조영 씨다. 당시 중견수를 맡아 약대 야구부의 첫 우승을 뒷받침했다.제 3회와 4회 대회에선 상대 야구팀의 활약이 돋보였다. 상대 야구팀은 3회 대회 예선에서 동국대를 8-5로 꺾고 대학야구선수권대회 참가 이후 첫 승을 올렸다. 다만 결승전에서는 성균관대에 1-5로 져 아쉽게 준우승했다. 대신 이듬해 4회 대회에선 결과가 달라졌다. 결승에서 성균관대와 다시 만나 2-1로 설욕했다. 첫 우승이었다.이때 상대 야구부 멤버 가운데도 유명한 분이 많다.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과 이호헌 KBO 초대 사무차장이 모두 당시 서울대 상대 야구부 소속이었다. 중견수 황기대 씨는 현재 백구회에 소속된 야구계 원로 인사다. 유격수를 맡았던 고(故) 박상규 씨도 실업야구 한일은행 창단 감독이자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셨다.그러나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는 이듬해인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원치 않는 휴지기를 맞았다. 한국전쟁(6·25 전쟁)이 벌어진 탓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시대의 아픔으로 인한 부침을 겪었다. 같은 학교 야구부원 사이에서도 이념의 차이로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훗날 북한으로 넘어간 선수도 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954년 대회가 재개됐지만, 서울대에서는 상대 야구부만 출전했다. 해군사관학교까지 포함해 총 5개 팀이 참가했다. 상대 야구부는 한양대 공대 팀에 2-3으로 졌다. 그리고 마침내 새 역사가 시작됐다. 그 다음해에 열린 1955년 대회부터 마침내 진짜 '서울대 야구부'가 출범했다. 상대, 약대, 사범대 야구부가 하나로 통합됐다. 서울대뿐만 아니라 성균관대, 숭실대, 육군사관학교, 중앙대가 모두 단과대 구분 없이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서울대는 중앙대를 7-2로 꺾었다. 역사적인 '서울대 야구부'의 첫 승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당시 멤버는 김재복(2루수), 최경남(1루수), 박종해(포수), 장태영(투수), 심응준(중견수), 서병인(좌익수), 박은진(3루수), 한정준(우익수), 김유석(유격수)이었다. 서울대 상대에 재학 중이던 김유석 씨는 타율 0.625를 기록해 타격상을 수상했다. 김재복 씨는 1960년대에 청양 종합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박종해 씨는 선린상업고등학교(현 선린인터넷고) 감독 겸 교사를 역임했다. 장태영 씨는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름이다. 실업야구 상업은행 초대 감독이자 대한야구협회 이사 출신이다. 특히 경남중 시절이던 1949년 청룡기 쟁탈 전국중등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광주서중 김양중과 치열한 라이벌전을 펼친 일화는 전설로 남아있다. 서울대 야구부는 그렇게 첫 승을 올린 뒤 결승전에서 성균관대를 만나 우승까지 노렸다. 그러나 아쉽게 5-7로 패했다. 성균관대에선 어우홍(전 MBC·롯데 감독)과 어지용 형제가 맹활약했다.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와 서울대 야구부의 인연은 여기서 중단됐다. 1956년에는 주최 측 사정으로 대회가 열리지 않았고, 1957년부터는 서울대 교내 사정으로 불참했다. 여기까지가 서울대 야구부 역사의 1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대신 서울대 야구부는 다른 대회에서 또 다른 역사를 이어갔다. 1961년 대학야구연맹이 창설되면서 전국대학 춘계연맹전이 새로 생겼다.서울대는 3회째인 1963년부터 참여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는 그 후의 역사와 승리, 그리고 새삼 서울대 야구부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게 된 진짜 이유를 얘기해볼 생각이다. <2편에서 계속> 김인식 KBO 규칙위원장정리=배영은 기자 2016.06.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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