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축구는 야구와 다르다, 홈·원정 팬을 철저히 분리해라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 전 중 하나이다. 또한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MLB를 넘어 미국프로스포츠에서 가장 유명하고 치열한 라이벌 구도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두 팀의 경기가 열리는 날 여러분이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고 양키 스타디움에 입장하면 홈 팬들은 얼마나 적대적으로 당신을 대할까?정답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간헐적으로 가벼운 놀림이나 짓궂은 농담을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고, 정말 운이 나쁘지 않다면 어떠한 심각한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실제로 양키 스타디움에는 레드삭스와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앉아서,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 축구팬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 일이다. 영국 축구장에서는 서포터들이 클럽의 동료 팬들과 함께 경기를 관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홈 팬과 원정 팬을 철저히 떨어뜨려 놓는 것을 영국에서는 ‘팬 분리(fan segregation)’라고 칭한다.
축구는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에서 노동자들의 스포츠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팬 분리’는 지지자들의 사회적 계급과 연관이 있을까?정답은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북부 잉글랜드에서 탄생한 ‘럭비 리그(Rugby League)’의 경우, 서포터들이 섞여서 각자의 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럭비 리그 팬들은 상대편 팬들과 경기에 대해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팬들 사이에 격렬한 대화가 오갈 때도 있지만, 특별한 충돌 없이 이러한 토론은 악수로 끝을 맺곤 한다. 럭비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팬들 간에 상호 존중의 문화로 번창해 왔기 때문이다.따라서 팬 분리는 축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물론 축구도 항상 이런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축구장의 관중석 분리는 덜 형식적이었다. 당시에도 홈 팬과 원정 팬이 모이는 구역이 존재했지만, 서포터들은 일반적으로 경기장 어느 구역이든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다.하지만 1967년 ‘업튼 파크(Upton Park, 웨스트 햄의 옛 홈구장)’에서 열린 경기가 이를 바꾸어 놓았다. 1967년 5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는 리그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웨스트 햄과 경기를 벌였고, 원정 온 맨유 팬들은 그라운드 곳곳을 가득 채웠다. 당시 웨스트 햄 팬들은 업튼 파크를 가득 메운 맨유 팬들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결국 관중석에서 발생한 무질서는 양 팀 팬들의 무력 충돌로 이어져 20명 이상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1967년 9월 같은 장소에서 두 팀은 다시 한번 맞붙었고, 웨스트 햄 서포터들은 맨유 팬들에게 복수했다.1974년 맨유가 2부리그로 강등되자 ‘더 레드 아미(The Red Army, 1970년대 맨유의 원정 팬들을 가리키는 명칭)’는 세필드, 카디프, 첼시, 요크 등 영국 전역의 축구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1970년대 훌리건의 대명사가 된 더 레드 아미는 때로는 홈 응원단보다 더 많은 관중을 동원하기도 했다. 게다가 1974년에는 경기 중 볼튼 원더러스 팬이 블랙풀 팬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더 레드 아미의 계속되는 난동과 살인 사건으로 인해 영국 축구장에는 관중 분리와 펜스 설치가 도입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팬 분리 정책은 훌리건주의의 성장과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반응은 엇갈린다.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좌석 분리를 통해 축구장 안의 치안이 강화된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 분리된 환경에서 팬들은 상대편 서포터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응원할 수 있게 되어 경기장 분위기가 개선됐다는 것이다. 동료 팬들과 나란히 서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상대팀 서포터들과 마주하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심장이 뛰면서 군중의 원초적인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그에 반해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팬 분리로 인해 ‘우리 편과 상대 편’이라는 적대적인 구도가 더욱 선명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양쪽에서 도발적인 행동과 구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엄격한 구분으로 인해 팬들의 대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의식화된 폭력은 경기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다행히 영국 축구장에서 상습적인 폭력 상태가 벌어지는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하지만 당시의 영향과 전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현재도 많은 서포터들은 홈 구역에 상대팀 팬이 앉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상대팀 셔츠를 입은 팬이 아무런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이들은 스튜어드에 의해 축구장에서 쫓겨난다. 심지어 홈 서포터들 사이에 앉아 원정 팀의 골을 축하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어린이 관객마저도 추방될 수 있다. 이런 경우 티켓 값도 환불되지 않는다. 상대팀 팬에 대한 공포와 분노는 여전히 영국 축구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영국 축구장을 방문하는 한국인 팬들에게도 주의가 요구된다. 기억하자. 홈 팀과 원정 팀이 섞인 ‘반반 스카프(half-and-half scarves)’는 절대 걸치지 말자. 손흥민의 7번 셔츠는 토트넘 팬 구역에서만 입어도 충분하다. 특정 팀의 셔츠를 입고 동네방네 다니는 것도 좋은 생각은 절대 아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손흥민 팬이지, 토트넘 팬도 아니지 않는가?
2025.04.12 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