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야구계 속설 얼마나 깨졌나, 팩트체크해드립니다
포츠계처럼 많은 속설과 징크스가 있는 세계도 찾기 드물다. 심지어 메이저리그에서도 지금은 깨졌지만 '밤미노의 저주(베이브 루스를 1919년 뉴욕 양키스에 판 뒤 86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보스턴 레드삭스), '염소의 저주(1945년 한 팬이 염소를 데리고 야구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뒤 71년간 우승하지 못한 시카고 컵스)' 등이 유명했다. 과연 야구판에서 이어지던 각종 저주와 징크스는 지금도 유효할까. 새해를 맞아 '팩트 체크'해봤다.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 깨졌다 프로야구 드래프트가 다가오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이영민. 일제강점기인 1905년 태어난 그는 훌륭한 야구선수이자 축구선수였고, 행정가로서도 활약했다. 1958년 대한야구협회는 그를 기려 최고의 고교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을 만들었다. 현재는 고교야구 성적 타율 1위에게 수여된다. 그러나 이영민 타격상을 받은 선수들이 묘하게도 성인 무대에선 큰 활약을 펼치지 못해 '이영민 타격상의 저주'란 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이영민 타격상의 저주가 거론된 건 90년대 이후로 알려져 있다. 그 전까지는 백인천(1959년), 최관수(1960년), 이광환(1965년), 정현발(1971년), 김일권(1973년), 이만수(1977년) 등이 실업과 프로에서 활약했다.'저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프로야구에서 드래프트의 중요성이 커진 1990년대부터다. 기대를 걸고 지명한 선수들이 꽃을 피우지 못한 사례들이 등장했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1981년 수상한 구윤이 대표적이다.구윤은 경북고 시절 성준, 류중일, 문병권과 함께 고교야구 3관왕을 이끌었다. 강한 어깨 덕에 투수로도 나섰던 그는 중앙대 진학 후 큰 빛을 보지 못했다. 1986년 1차 지명으로 연고구단 삼성에 입단했지만 잦은 부상 탓에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1993년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한 뒤 이듬해 은퇴했다.이후에도 김경기(1989년)를 제외한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는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7년 수상자 김훈은 1993년 해태 타이거즈 입단과 동시에 개막전부터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최강 해태에서 신인이 1군 선배들과 나란히 선 것만으로도 그에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하지만 입단동기 이종범, 이대진과 달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12년만에 은퇴했다.1991년 수상자 강혁은 '비운의 선수'로 통한다. 좌타자 강혁은 신일고 시절 '천재'로 불렸으나나 OB 베어스(현 두산)와 한양대 사이 이중계약 파문에 휘말리며 프로로부터 영구제명됐다. 한양대 시절엔 2사 만루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냈다는 일화도 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나섰다. 프로에 갈 수 없었던 강혁은 당시 특급 선수를 쓸어담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로 향했다. 뒤늦게 징계가 풀려 두산으로 향했지만 꽃을 피우진 못했다.강혁의 신일고 후배 조현도 엄청난 유망주였다. 조현은 1993년 봉황대기 결승에서 홈런 3개를 터트린 거포였다. 1995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조현은 미래의 홈런왕으로 꼽혔고, 그해 전반기에만 9개의 홈런을 쳤다. 하지만 이후 급격하게 정확도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해태와 한화 이글스를 거쳐 은퇴했다. 통산 기록은 타율 0.232, 14홈런.그러나 이제 '이영민 타격상'을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2004년 수상자 최정(SSG 랜더스), 2005년 수상자 김현수(LG 트윈스) 덕분이다. 인천고를 졸업한 최정은 2005년 SK 와이번스(SSG 전신) 데뷔하자마자 두자릿수 홈런을 쳐 '소년 장사'로 불렸다. 이후에도 홈런왕에만 세 차례 오르며 통산 홈런 2위(403개)에 올랐다.김현수는 신일고 당시 어느 팀에도 지명받지 못했다. 하지만 신고선수로 두산에 입단했고, 2년차가 되자마자 1군에서 활약했다. 2008년 최연소 타격왕에 오른 김현수는 KBO리그를 대표하는 좌타자로 우뚝 섰다. '타격만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타격 기계'로 성장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을 시작으로 국제대회에만 9번 출전한 국제용 타자이기도 하다.최근 들어 이영민 타격상 징크스는 좀처럼 거론되지 않는다. 이후에도 하주석(한화), 박민우(NC 다이노스), 송성문(키움 히어로즈), 최원준(KIA), 김혜성(키움) 등 대다수 선수들이 프로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상자를 고교 대회 한 시즌 기준으로 타율만 가지고 선정하기 때문에 '이영민 타격상=최고의 타자'란 등식이 성립하기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엘롯기 신인왕 징크스, 아직 한 팀 남았다 프로야구 팬이라면 '엘롯기'란 단어를 모르는 이가 없다. 대표 인기구단인 LG, 롯데, KIA를 합친 말이다. 세 팀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 말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세 팀이 최하위를 번갈아 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였다.세 팀에겐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신인왕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LG는 전신인 MBC 청룡(김건우, 이용철)을 포함해 90년대 중반까지는 5명이나 수상했다. 김동수(1990년), 유지현(94년), 이병규(97년)는 신인상 수상 이후에도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병규 이후엔 20년 넘게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옆집 두산이 '화수분'으로 불리며 신인들을 잘 키우는 것과 대조적이었다.롯데와 KIA도 마찬가지다. 롯데는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염종석이 유일한 신인왕이다. 해태도 1985년 이순철 이후엔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롯데의 경우 연고지 부산에서 특급 선수들이 여럿 나왔지만 신인왕을 받은 선수는 없었다.결론부터 말하면 엘롯기 신인왕 징크스는 '일부 유효'다. 깨져가고 있지만, 아직 남아있는 팀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탈출한 팀은 LG다. 2019년 잠수함 투수 정우영이 데뷔하자마자 활약하면서 당당히 신인왕을 받았다. 구원투수라는 점에서 불리했지만 순수 고졸 신인이라는 점이 크게 반영돼 중고신인 이창진, 전상현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KIA는 36년 만에 왼손투수 이의리가 '타이거즈 신인왕' 계보를 이었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이의리는 지난해 19경기에서 4승 5패 평균자책점 3.61을 기록했다. 부상 탓에 시즌 막판엔 결장하기도 했으나 비율 기록이 워낙 좋고,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활약한 것이 표심에 반영됐다. 이순철 해설위원에게 '신인왕 징크스를 깨겠다"고 했던 약속도 지켜졌다.롯데는 아직까지 염종석 이후 신인왕이 없다. 지난 시즌 20홀드를 올린 셋업맨 최준용이 이의리와 접전을 벌였으나 유효표 115개 중 1위 표 61개를 받은 이의리(최준용 42개)에 밀렸다. 구원투수란 점, 그리고 데뷔 2년차란 점이 발목을 잡았다. 어느덧 롯데의 마지막 우승, 신인왕도 30년째를 채우게 됐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2022.01.31 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