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하일성 전 총장 사망, 야구도 인생도 모르는 것
“야구 몰라요”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인생도 모르는 것이다.명 야구해설가이자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을 지낸 하일성씨가 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삼전동 사무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했다. 향년 67세.한국 야구 방송에서 고인이 미친 영향은 크다.해방 이후 최초의 야구 중계는 1946년 9월 15일 열린 청룡기 전국중등학교선수권대회 5일째 경기중과 동산중의 경기에서였다. 중계석에선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윤길구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았지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는 ‘야구해설가’라는 직종이 없었다.최초의 전속해설가는 인천고 명투수 출신 서동준이다. 그는 1965년 최초의 민영 TV방송인 동양방송(TBC)에서 전속 해설가로 활동했다. TBC의 서동준과 동아방송(DSB)의 김계현은 당대의 라이벌 해설가였다. 이후 고교야구 붐을 타고 풍규명, 이호헌, 김동엽 등 여러 해설가들이 등장했다.고인은 환일고 체육교사던 1979년 TBC에서 서동준의 후임으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성동고 시절 유격수로 활약했지만 경희대 진학 뒤에는 야구를 접었다. 야구계에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 MBC 선수 이해창의 장인인 풍규명씨가 “고교 때 야구를 잘 했다”고 보증을 했다.TBC에서 고인과 함께 야구중계를 한 원로 아나운서 유수호씨는 “수염을 잔뜩 기른 우락부락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순수했고, 무엇보다 열정적이었다”고 고인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무명인 만큼 노력을 했다. 야구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자신을 낮추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이런 자세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갔다.야구규칙을 외우다시피 했다. 공부에 바탕을 둔 정확한 해설은 선배 해설가들과의 차별점이었다. 대개 감독 출신이거나 현직 감독인 기존 해설가들은 실수를 질책하는 해설을 자주 했다. 하지만 고인은 대중의 눈높이에서 야구를 전달하려 애썼다.그리고 엔터테인먼트를 가미했다. 과감하게 예측을 하고, 맞아 떨어지면 “그것 보세요”라고 툭 뱉는 한 마디는 그를 유명하게 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해설에 대해 “대중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해설을 하려 했다”고 자평했다. 그의 해설 스타일을 싫어했던 야구 팬도 많았다. 하지만 1980년대 프로야구 출범 이후 그가 소속된 방송사는 시청률 경쟁에서 앞서 나갔다. 명 해설가로 명성을 날리던 고인은 2006년 KBO 사무총장에 선임되며 야구 행정가로 변신한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고인과 친분이 있던 일본 프로야구 원로 장훈씨는 당시 “하일성이 사무총장이 됐어?”라고 놀라기도 했다.고인은 ‘야구인 출신으로 프로야구 행정을 책임지고 싶다’는 의사가 강했다. 사무총장 취임 이후 KBO와 적대적인 관계였던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와 대화를 물꼬를 튼 것도 ‘야구인’이라는 정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구단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KBO 사무총장 하일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2009년 4월 물러나기까지 KBO 최대 현안이던 현대 유니콘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KT와는 현대 인수에 합의까지 해 놓고 막판에 뒤집혔다. 결국 센테니얼인베스트라는 사실상 이름 뿐인 회사에 현대를 맡겼다. 센테니얼이 창단한 지금의 넥센 히어로즈는 이장석 구단주가 거액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센테니얼이 낸 가입금으로 130억원이 넘는 KBO의 현대 지원금을 충당했지만, 이 돈으로 현대 전 임원들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지금도 KBO의 실책으로 비판받는 일이다.사무총장에서 물러난 뒤 방송계로 복귀했지만, 열정은 예전 같지 않았다. 개인 사업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3~4년 전, 한 지인은 고인에게 “나이가 들었다. 야구에서 많은 것을 얻었으니, 이제는 야구에 공헌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고인은 “좀 기다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경기도에 야구장을 만들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팔았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매각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인들에 따르면 양도소득세 등 급한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조직폭력 관련 인사를 통해 거액을 빌렸다. 1980년대부터 친분이 있던 인사였고, 지난 2013년 사망했다.이후 고인은 여러 구설수에 휘말렸다. 지난해와 올해 사기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피소됐다. 돈 문제였다.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최근까지도 지인들에게 여러 차례 돈을 융통하기도 했다. 유산과 사업으로 부유하다고 알려진 고인의 재정난을 가까운 이들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 지인은 “부동산 문제로 빌린 돈 상환 압박이 컸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야구계와의 인연도 거의 끊겼다. 야구계에서 누구보다 인맥이 넓었지만, 모습을 좀체 드러내지 않았다. 사망 전날 고인은 동갑 친구인 윤동균 전 OB 감독에게 전화를 해 “절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사무실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KBO 사무총장 시절 고인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해설가로 김동엽 전 해태 감독을 꼽았다. ‘빨간장갑의 마술사’로 불렸던 김 전 감독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과감한 예상을 하라”는 조언을 받고 이를 신조로 삼았다. 강한 개성과 쇼맨십으로 유명했던 김 전 감독은 지난 1997년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외롭게 숨졌다.두 해설가 모두 어느 야구인보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외로웠다. 최민규 기자
2016.09.08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