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최규섭 기자의 손자병법, 현대캐피탈 기업광고
전쟁은 속이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것처럼 나타낸다.
(兵者 詭道也 故 能而示之不能.孫子兵法 第一 始計篇)
군대의 형체의 극치는 형체가 없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形兵之極 至於無形.孫子兵法 第六 虛實篇)
손자가 처음 전쟁에 도입했다고 알려진 `허허실실(虛虛實實)`은 동서고금에 있어 병가(兵家)들이 가장 즐겨 쓴 전술 가운데 하나다. 허에는 허로, 실에는 실로 대응한다. 허한 듯 실하고, 실한 듯 허하게 운용한다. 얼핏 종잡기 힘든 이 전술은 숱한 전쟁의 승패를 가름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예견케 한 미드웨이해전(1942년 6월)도 그랬다. 미군 정보부는 이 해전에 앞서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했다.
당연히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알게 됐으니 승리는 반쯤 손안에 들어온 셈. 그런데 특종에 눈이 먼 한 기자가 이 사실을 기사화하며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됐다. 일본은 경계심을 잔뜩 돋우고 암호를 바꿨고, 미국이 도리어 수동적 처지에 몰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이때 보인 반응은 `허실상란(虛實相亂)`. 허와 실, 가짜와 진짜를 혼란시키는 묘수였다. 그는 중대한 전쟁 정보의 누설에 대해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양 멍청이처럼 행동했다.
만파로 번질 듯했던 사건은 금세 수그러들며 처음부터 별 게 아니었던 일처럼 인식됐다. 덩달아 일본도 차츰 대수롭지 않게 흘러 넘겼다. 그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게 한 큰 지혜(大智若愚)는 이 해전의 승패를 판가름 지은 중요한 한 요인이 됐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개전(1941년 12월) 이래 줄곧 수세에 몰렸던 미국은 이 해전의 승리를 디딤돌 삼아 대역전극을 연출할 수 있었다.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어지고, 네모진 그릇에 넣으면 네모가 된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일정불변의 태세란 있을 수 없다. 물 흐르듯 상대의 태세에 따라 작전을 변환, 그 허를 찔러야 한다. "상대의 꾀를 내 꾀로 만드는 것(將計就計)”만한 모략도 달리 없다.
또한 능력이 있고 어떤 전략과 전술을 쓰면서도 겉으로는 무능하고 아무런 전략과 전술이 없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현대캐피탈의 기업 광고 `놀라운 이야기` 극장 편이 그렇다. 허허실실 전술을 빼어나게 운용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허이고, 어디까지가 실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허와 실을 교묘하게 교차시켜 고객의 머리와 눈을 자극한다.
현대는 `자기 PR시대`다. 당연히 자신의 장점만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 CF는? 후반부는 놀랍게도 실수투성이다. 다름 아닌 NG 모음이다. 랩을 부르던 주인공이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못한 자동차에 치여 오징어처럼 납작해진다. 또 돈주머니가 뜯어지면서 동전이 쏟아지고 랩을 부르던 주인공은 깜짝 놀라 피하려다 뒤로 넘어진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사실감 있게 들린다. 황당한 장면의 연속이다.`허(虛)`가 `실(實)`-회사의 상품과 기업 현황을 흥겹게 랩으로 소개하던 천양지차의 전반부-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끝이 아니다. 애니메이션 CF다. 애니메이션=아이, 금융 회사=어른. 이 등식은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CF는 역설하고 있다. `어떻게 애니메이션과 금융 회사가 어울릴 수 있나`라는 통념을 무참하게 깼다. 애니메이션 CF도 어른들에게 보다 재미있고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형체의 극치는 형체가 없음이다. 자칫 허황된 느낌으로 끝날 수 있는 우려를 가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효과를 배가시킨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기획취재팀장 kschoe@ilg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