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한국 선수들이 끝까지 싸워 토고전 승리를 지켜내 그저 기쁘다. 남미 언론의 코를 납작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페루 유명 일간지 ‘엘꼬메르시오페루’에서 1주일 전 발간한 월드컵 잡지 ‘코파(COPA)’는 한국팀을 “2002한일월드컵에서 검은 손의 도움으로 4강에 올랐다. 2006독일월드컵에서는 홈관중의 열렬한 응원과 심판의 도움없이 그들의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소개했다. ‘코파’뿐 아니라 남미언론은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이 일궈낸 ‘4강신화’를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만들어진 성과라고 깍아내리기 일쑤다.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한참 뒤떨어지는 남미지만 스포츠. 특히 축구에 있어서 인종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어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페루 언론은 ‘아시아인은 역시 안돼!’ ‘검은 대륙에 밝은 빛은 언제?’ 류의 제목으로 월드컵 기사를 내보낸다. “돈은 많을 지 모르지만 아시아인은 신체적으로 축구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월드컵 개막 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팀 모두를 ‘최약체’로 구분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이 토고를 이긴 뒤 남미언론의 한국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엘꼬메르시오페루’는 한국의 승리를 인터넷 속보로 전하며 “한국이 다시 깨어났다. 히딩크의 마법은 필요없다”고 극찬했다. 이어 레드카드를 불러들인 박지성을 ‘재앙의 예언자’ 이천수를 ‘프리킥의 마법사’ 역전골을 성공시킨 안정환은 토고를 끝장낸 ‘교수형 집행인’으로 묘사하며 칭찬했다. 1주일만에 태도가 급변한 것이다.
2002한일월드컵 결과로 한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 언론도 한국을 칭찬했다. 스페인 일간지 ‘리버타드디지탈(Libertad Digital)’은 ‘한국은 대단한 후반전으로 토고의 꿈을 끝장냈다’는 제목으로 “2002한일월드컵 영웅 안정환의 강력한 슛은 아시아인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고 소개했다.
경기는 결과가 말해준다. 축구마니아라고 해도 한국 팀을 아는 외국인은 거의 없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 피튀기는 붕대 투혼 끝에 1-1로 비긴 벨기에 전이나 94미국월드컵에서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로 무승부를 기록한 스페인 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이 홈에서 뿐아니라 원정경기에서도 승리를 뽑아낼 수 있는 팀이라고 각인시켰다.
토고전에서 한국선수들이 프리킥을 차지 않고 뒤로 돌린 것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후반 막판의 소극적인 플레이는 무척 부끄러웠다” “월드컵 경기장에 한국팀을 향한 야유소리가 심했다” 등의 비판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월드컵은 전쟁이다. 전쟁에서 일단 이겼으니 즐기자’ 월드컵은 전쟁이 아니라 스포츠라고? 그럼 ‘월드컵은 하나의 스포츠다. 일단 이겼으니 즐기자’라고 말이다.
IS 페루 W리포터 정세민 blog:http://blog.joins.com/leondec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