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장에 가기 전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면서 하얗게 밤을 지새곤 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 나선 장터는 잔칫날에나 맡아 볼 수 있는 부침개 냄새가 진동하고.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귀를 흥겹게 하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만큼 온갓 신기한 물건들이 지천으로 깔려 최고의 놀이터가 되기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무지개 사탕 한 개 손에 쥐어 주면 마냥 행복했고. 어쩌다 새 운동화라도 품에 안으면 온 세상을 차지한 느낌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장터에 발을 내디디면 콩당콩당 심장이 뛰기는 마찬가지다.
■온통 2000원 세상 호미씻이도 끝나는 처서를 보낸 지도 일주일여가 지났다. 선들선들 가을 바람이 귓가를 간지른다. 나들이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다. 가족과 함께 시골 장터를 찾아보자.
전국적으로 100개 이상의 5일장이 서고 있다(표 참조). 이젠 더 이상 신기하지 않지만 철부지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다. 이중 정선장은 관광열차까지 개발될 만큼 인기가 높다. 지금부터 꼭 40년 전인 1966년 2월 17일 읍내 조양 강변에서 개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넉넉한 인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지난 7월 ‘물폭탄’이라 불릴 만큼 사상 유래 없는 수해 속에서도 좌판은 어김없이 펼쳐졌다.
장터 바로 옆 공설운동장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장으로 들어섰다. 폭 20m 남짓 되는 길 양편은 200여 개의 파라솔로 가득 메워졌고. 그 아래 좌판에서는 흥정이 한창이다.
장터는 대략 ‘2000원 세상’이다. 삶은 옥수수 세 개 2000원. 옥수수빵 2000원. 메밀전 2000원. 이런 식이다. 조금 비싸다고 해야 5000원. 1만원을 넘지 않는다. 한창 옥수수를 다듬던 한 할머니는 구경하는 손님을 향해 “옥수수가 너무 싸. 오늘 아침에 내 손으로 따 온 거야”라고 소리 지른다.
장터에는 요즘 수확한 옥수수·황기·더덕이 지천이다. 모두 정선이 자랑하는 농산물이다. 1만원이면 알이 꽉 찬 옥수수 20개들이 한 자루를 살 수 있다. 황기나 더덕도 1만원에 한 묶음 준다. 취나물·고사리 등은 5000원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인심은 덤이다.
옆에는 감자·메밀 부침개를 곁들여 막걸리를 들이키는 촌로. 강원도 산골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콧등치기·올챙이국수 등으로 허기를 달래는 사람도 눈에 띈다. 콧등치기에 대한 주인 아주머니의 설명이 재미있다. “정선역에 기차가 서는 시간이 너무 짧아 급하게 먹는 국수가 콧등을 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 시골 장터의 재미는 변함없이 넉넉한 인심이다. 가격은 숫자에 불과하고 모든 것은 흥정에서 결정된다. 가을의 정선장에서는 황기·더덕·옥수수 등을 싸게 살 수 있다.
■시골 장터의 명물들 시골 장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약장수·엿장수·뻥튀기 장수 등이다. 아쉽게도 정선장에서는 엿장수나 뻥튀기 장수는 만날 수 없다. 약장수의 구수한 입담은 여전하다. 돌미나리씨를 좌판 가득 쌓아 놓고 만병통치약이라고 자랑이다. “황기·가시오가피 등 네 가지 약재를 넣어 주지. 이걸 끌여서 매일 아침 한 잔씩 마시면 오줌발이 틀려져.” 이 말에 솔깃한 어르신들은 꼬깃꼬깃 접어 놓은 지폐를 꺼내든다. 예나 지금이나 만병통치약의 약발은 서는 모양이다.
장터의 또 다른 재미는 좌판에 쪼그려 앉아 먹는 부침개이다.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 그 위에 지지는 감자전·메밀전 냄새가 구수하다. “한 장에 1000원. 석 장에 2000원이야. 맛있어”라면서도 손놀림이 바쁘다.
12년째 정선 5일장에서 직접 떡메를 쳐 인절미를 만들어 파는 민병만(47·정선읍 봉양 1리)씨는 “외지 상인이 많이 몰려들면서 예전 같은 모습은 많이 퇴색했다. 그래도 시골 장터의 훈훈한 인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 장이 서는 날. 5일마다 친구를 만난다는 기쁨에 어르신들은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요즘 시골 장터에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에 나오는 허 생원과 같은 장돌뱅이는 보기 힘들다. 대신 인근에서 찾은 시골 아낙들이 그 자리를 대부분 메운다.
그래서인지 젊은 장사꾼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 할아버지·할머니들이다. 여름 내내 말린 취나물과 고사리를 팔기 위해 정선군 남면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왔다는 김점순(67) 할머니도 그중 하나다. “나물 파는 재미도 있지만 5일에 한 번 친구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지. 10년이 훨씬 넘었지. 같이 밥도 먹고. 사는 이야기도 하고 …”라며 장터 나들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 좌판에 쭈그리고 앉아 먹는 감자전과 메밀전은 정선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이다.
인근 평창·태백·동해·제천 등에서 바리바리 팔 물건을 싸들고 찾는 정선장에는 멀리 충남 공주에서 오는 상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