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새벽 4시. 캄캄한 새벽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하나 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2014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기 위한 태백산(1566m) 천제단행 행사에 참가하는 120여 명의 사람들은 단단히 채비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김진선(61) 강원도지사도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서 일행과 함께 했다. 조금씩 굵어지는 눈발이 벌거벗은 가지에 눈꽃을 만들어갔다. 마치 유치가 확정돼 축하한다는 듯 탐스럽게도 핀다. 천제단으로 오르는 길. 김지사의 산에 대한 이야기도 눈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산이 준 선물
김 지사는 두타산(1353m)과 지척인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강원도라는 곳이 주위를 둘러보면 산이 자리하고 있으니 산과 친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2박 3일간 무릉계와 용추폭포를 다니며 야영을 하기도 했다. 때론 혼자서 산 속에 있는 무덤 옆에다 천막을 치고 밤을 보낸 경우도 있었다. “이때 들려오는 계곡의 물소리는 천가지 만가지죠. 졸졸졸 흐르기도 하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기도 합니다. 자연의 신비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죠.” 이렇게 홀로 산행을 즐기다 한번은 하산길에 공비로 몰려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김 지사에게 있어 산행이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은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준 것. 1974년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연수를 받을 때 등산 리더를 맡아 속리산·계룡산·대둔산 등 충청권의 여러 산들을 다녔다. 그 해 가을엔 대둔산에 올랐다 서울의 세 아가씨 사진을 찍어줬는데. 그 중 한 아가씨와 사진을 주고받다 친해지면서 결혼까지 이르렀다. “제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한 해였죠.”
■바위가 준 짜릿함
바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74년이다. 친구의 권유로 한국산악회에 가입한 후 암벽등반 훈련을 받았다. 북한산 인수봉. 도봉산 선인봉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후. 설악동 적벽과 하늘길 등반에도 나섰다. “바위의 우직함이 좋았죠. 바위의 변치않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도 일관된 자세를 지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암벽등반의 짜릿함이 좋긴 했지만 바빠진 생활 탓에 3년 정도 즐기고 나서 뜸하게 됐다. 하지만 이 때 얻은 자신감은 98년 강원도 홍보CF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설악산 권금성 리지에서 하강을 멋지게 선보인 것이다. “그만둔 지 오래돼서 걱정이 됐죠. 그렇다고 겁을 먹은 건 아니고요. 자신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태백산과의 인연
오전 6시 30분께. 어느덧 태백산 정상에 올랐다. 천제단에서 2014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세찬 눈보라도 유치를 기원하는 120여 명의 뜨거운 염원 앞에서 기세를 떨치지 못한다. “평창 파이팅”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제를 올리고 나서 10분 정도 내려가니 망경사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해가 떠오를 시간이지만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 때 어디선가 “해다 ”라는 소리가 들린다. 빨갛게 떠오르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날씨에 일출을 보다니…. 아무래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거라는 예시 같은데요.” 모두들 길조라 생각하며 한참을 쳐다본다.
김 지사가 태백산을 오른 것은 올해로 10년째다. 98년 강원도지사로 당선된 이래로 매년 새해가 되면 꾸준히 태백산에 오른 것이다. “태백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자 백두대간의 중심입니다. 이 산을 오를 때는 정상을 정복한다거나. 건강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은 저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입니다. 이곳에서 도민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저 자신 또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죠.”
■닮고 싶은 어엿한 산
당골로 내려오는 길은 눈이 많이 쌓인데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어 무척 미끄러웠다. 하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천제를 올렸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출을 본 덕분인지 발걸음이 무척 가볍다. 조심조심 하면서도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올해 제가 생각하는 사자성어는 회사후소(繪事後素)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이 있고 나서야 그릴 수 있다는 뜻이죠. 마치 산이 확고한 바탕을 만들어 놓고 사계절의 풍모를 자유자재로 그려나가는 것처럼 말이죠. 스스로 내공을 쌓고. 준비하고 연마하는 것이 그 바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이 저에게 준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무사히 당골로 내려왔다.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서 말이다. 하지만 얼굴 가득 미소가 넘쳐난다. 올 7월 4일 과테말라 IOC총회에서 “평창”이라는 소리가 울려퍼질 것을 확신한다는 듯이.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1946년 강원도 동해 출생.65년 북평고등학교 졸업. 74년 동국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 합격.1983~1985년 강원도 영월군수. 1985~1991년 내무부 법무담당관. 기획예산담당관. 교부세·재정과장. 1991~1992년 강원도 강릉시장. 1992~1993년 강원도 기획관리실장. 1994~1995년 경기도 부천시장.
1995~1998년 강원도 행정부지사. 1998년 7월 1일부터 제32·33·34대 민선 강원도지사. 1999~현재 동국대·한양대 겸임교수. 2005~현재 캐나다 앨버타대 명예교수. 중국 지린대학 고문교수. 2006년 8월~현재 민선 4기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