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에겐 봄에 산을 오르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다. 아니, 애당초 정상에 오르겠다는 생각조차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몇 발자국 옮기다 멈추고 옮기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출·퇴근길 지·정체로 몸살을 앓는 도로가 연상될 정도로 자주 멈춰서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아주 작은 꽃송이를 쳐다보느라, 이리저리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그들의 얼굴엔 행복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꽃 산행'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다.
이런 꽃 산행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현진오(44) 동북아식물연구소 소장 덕분이다. 꽃 산행이라는 주제로 산을 찾은 지가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섰다. "산에 왜 가냐고요? 자연이라는 식구들·친구들 만나러 가죠"라고 말하는 그에게 산은 꽃밭이다.
■자연이 좋았던 제주 청년
봄에 피는 야생화를 만나기 위해 현 소장과 함께 찾은 곳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천마산(812m). 4월 하순의 천마산은 얼레지가 지고, 피나물이 한창 노란색 꽃을 발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천마산은 본격적 꽃 산행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했던 그는 졸업 논문으로 천마산 식물상을 연구했다. 1985년 한 해 동안 열한 번을 찾았다. 그렇게 처음 천마산을 찾은 지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다.
"예전엔 점현호색 천지였죠. 그런데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 발길이 잦아들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점현호색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처음 이 꽃을 보았던 곳이 천마산이기에 애착이 더 가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 입학 당시 인기가 많았던 유전학보다는 생태학에 관심이 많아 식물학을 선택했다. 또 2학년 때는 순전히 자연이 좋아 문리대 산악회에 가입했다. 그런데 산악회에서는 생전 알지도 못했던 바위를 오르게 됐다. 인수봉을 오르면서 손은 온통 긁힌 자국으로 피투성이가 됐다. "부모님이 물려 준 소중한 몸을 왜 이렇게 험하게 다루는지 이해가 안됐죠.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바위를 다시 찾고 싶더라고요."
■생존에 도움을 주는 식물
호평동에서 천마의 집으로 오르는 길에 줄딸기가 보였다. "외래 식물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사람 때문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식물들도 문제죠. 줄딸기가 그런 경우예요." 사람들이 자주 산을 찾고, 산 밑 턱까지 집들이 들어차면서 자연스럽게 생태계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줄딸기가 조난당했을 때는 유용하게 쓰인다고 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 줄딸기를 발견하면 분명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물에 대한 지식이 도움이 된 경우는 종종 있다고 한다. 한 번은 겨울 설악산에서 빙폭을 내려서고 있을 때였다. 자일을 걸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죽은 나무둥치. 선배가 "다 썩어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나무를 살펴봤다. 그랬더니 죽은 나무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사스레나무였다. "괜찮아요. 자일을 묶어도 아무 문제 없어요." 자칫 썩은 나무라고 포기하고 힘든 길을 택할 뻔한 위기를 모면했다.
■숨은 보물보다 더 귀한 식물
천마의 집에서 돌핀샘으로 오르는 길목에선 미치광이풀·노루귀·양지꽃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오남저수지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선 금강제비꽃·금붓꽃 등이 자꾸 발목을 부여잡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꽃들도 그에게는 해바라기보다 더 큰 꽃으로 보여지는가 보다. "제 친구들이잖아요." 웃음꽃을 피며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니 당연히 눈에 선뜻 들어올 법도 하다.
멸종 위기종에 대한 조사·연구·보호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그에겐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다. 백양더부살이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그 발견지를 샅샅이 뒤지다가 포기하고 돌아갈 즈음 생각지도 않았던 바닷가 근처 둑에서 찾은 적도 있다.
수원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법정 보호종 선제비꽃을 낙동강변에서 찾기도 했다. 간혹 깊은 숲속에서 잠깐 '실례'를 하러 길 밖으로 벗어났다가 생각지도 못한 귀한 식물을 발견한 경우도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호미를 발견했다. "야생화를 캐려고 가져온 것이면 안되는데 …" 하며 주인이 없다면 가져가야겠다고 집어든다. 또 보따리를 들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근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본다. "꽃 캐 가시면 안돼요." 신신당부한다.
"세상 모든 생명이 똑같이 주인인데 인간 혼자서 주인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그에겐 산이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꽃밭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사철 다양한 꽃들이 무궁무진하게 피는 천연의 꽃밭을 소중한 친구로 삼아 산을 찾는 것은 아닐까?
■현진오 소장은?
1986년 서울대학교 식물학과 졸업. 88년 서울대 식물분류학 석사. 92년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수료 후 연구생. 92~98년 등산 잡지 기자·편집부장. 98~2002년 ㈜한국자연정보연구원 편집국장.
99~현재 순천향대학교·아주대학교·단국대학교에서 시간 강사. 2002~현재 ㈜동북아식물연구소 소장. 2003년 환경부장관 표창. 1995~현재 백두대간식물탐사회 지도위원. 2003~현재 국립환경과학원 평가위원.
2005~현재 (사)대한산악연맹 환경보전위원장·이사. 저서 '아름다운 우리꽃'(1999·전 4권), '우리 민들레'(2002)', '사계절 꽃 산행'(2005) 등 다수. 2001년 MBC TV 자연 다큐멘터리 '희귀 식물의 보고 울릉도' 기획 촬영. 2007년 한국의 멸종 위기 식물 웹사이트(www.rareplant.info)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