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겨울,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 7살 이대호와 세살 터울의 형 이차호가 골목 어귀에 남았다. 온종일 함께 동네를 누볐던 친구들은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집 창문 틈 새로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나왔다. 형 차호는 동생 대호의 손을 잡았다. "집에 가자." 볼이 빨간 동생은 형을 따라 종종걸음쳤다. 형제가 도착한 곳은 컴컴하게 불 꺼진 단칸방. 성인 두 사람이 눕기도 어려운 크기였다.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4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재가 했다. 대호·차호 형제는 할머니 손에서 컸다.
"집에는 저와 대호만 있었어요. 할머니는 근처 팔도시장에서 된장과 채소를 파시고 밤 늦게야 집에 오셨어요." 차호씨가 말했다.
방은 추웠다. 숨만 쉬어도 금세 온기가 들어찰 정도로 작았다. 그래도 겨울 밤에는 오들오들 추위에 떠는 날이 많았다. "늘 옷을 다 챙겨 입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잠이 들었어요." 뜨끈해야 할 구들장에는 냉기만 흘렀다.
"연탄이 있었지만, 아껴야 했어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한파가 닥쳐와야 불을 지폈다. 차호씨는 당시 연탄 가격을 정확히 기억한다. "번개탄이 100원, 연탄이 150원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이 추운 날에는 할머니에게 돈을 받아 구멍가게에서 번개탄을 사왔어요." 허락된 연탄은 단 한 장. 혹시라도 불이 잘 붙지 않아 연탄이 꺼지는 날에는 새벽까지 자리를 뒤척였다. "꼬마들은 칭얼거리기 마련이죠. 그런데 대호는 단 한 번도 '형아, 춥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어린 대호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추워도 춥다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
이대호는 지난 4일 부산 서구 까치고개에서 형 차호씨와 함께 '사랑의 연탄 배달'을 했다. 2006년 이후 5년간, 꾸준히 해 온 봉사활동이다. 연탄 7000장을 배달한 후 그는 "주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면 고생하시다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1999년 작고)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9경기 연속 홈런으로 세운 세계신기록과 44홈런. 타격 전 부문 타이틀(최다안타·타율·홈런·타점·득점·장타율·출루율)도 휩쓴 이대호의 2010년은 어느해 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이대호는 형 차호씨와 함께 추운 거리로 나섰다. 비시즌만 되면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해 연탄을 배달하거나 양로원을 방문한다.
밤이 되면 어린 형제는 '강아지처럼' 팔도 시장으로 달려갔다. 별빛만 가득한 시장 구석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구루마(손수레)를 끌고, 그 뒤에서 저와 대호가 밀었죠." 동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실방실 웃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가 팔다 남은 음식으로 밥을 차려줬다. 김치와 된장. 소박한 밥상이었다. 하지만 대호·차호 형제는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그립다.
"겨울만 되면 할머니가 김치죽을 해주셨어요. 밥에 물을 붓고, 김치 줄거리를 썰어 넣고 끓인 거에요."지금 생각하면 보잘것 없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맛났다. 소풍날에만 맛볼 수 있었던 단무지 한 개, 어묵 한 줄 들어간 김밥도 별미였다.
서지영 기자 [saltdoll@joongam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