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은퇴하는 ‘골동품’ 이창수, 지도자의 길 걸어
국내 4대 프로스포츠 선수 중 최고령인 프로농구 창원 LG 센터 이창수(42·196㎝)가 정든 코트를 떠난다. 198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은 지 26년 만이다. 25일부터 열리는 플레이오프가 그의 마지막 무대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이창수의 별명은 '골동품'이다. 낡고 오래됐지만 여전히 소중하다는 뜻에서 강을준 LG 감독이 2년 전 지어줬다. 그는 1969년생으로 프로야구 이종범(41·KIA)·프로축구 김병지(41·경남)보다 한 살 많다.
야구는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으면서도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 부담이 적다. 축구에서도 40대를 넘어 경기를 펼치는 선수는 움직임이 적은 골키퍼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창수는 좁은 코트를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는 농구에서도 가장 격렬한 골밑을 지키는 센터다. 마흔을 넘어 현역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22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창수의 표정은 밝았다. "은퇴식(20일) 때는 울컥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괜찮더라. 이제 진짜 코트를 떠날 때가 됐나보다"라며 웃었다.
-26년 만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은퇴 경기 날 20분 정도 뛰었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그만큼 긴장했다. 공을 잡기도 버거웠다. 다행히 상대팀(전자랜드) 선수들이 수비를 대충해 7점·5리바운드·3블록슛이나 기록했다(웃음). 팬들과 가족들 앞에서 은퇴를 선언할 때는 정말 울컥하더라. 꿈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나는가.
"언제였더라…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최홍묵 군산고 코치가 다가와 농구 선수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단지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였다. 일명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셈이다."
-운동 신경이 좋았나보다.
"동네에서 농구를 즐기는 정도였다. 막상 농구팀에 들어가니 내가 제일 못하더라. 기본기가 아예 없었다. 군산고에서 2년 동안 기본기만 익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처음 투입됐다."
-대학과 실업, 프로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단지 성실하다는 것뿐이다. 기록을 봐도 알지 않는가. 하지만 몸 관리를 잘한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다. B형 간염으로 쓰러졌을 때만 빼고. 사실은 아직도 한 시즌 더 뛸 수 있는 체력이다(웃음)."
이창수는 1996년 B형 간염 판정을 받아 코트를 떠났다. 의사가 '농구를 그만둬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트를 한바퀴 도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몸관리와 치료를 받은 끝에 1998년 극적으로 코트에 돌아왔다.
-매번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만족하는가.
"농구 선수 모두 주연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팀은 혼란에 빠진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리바운드와 수비를 할 때 팀 동료가 빛난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수로 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창수가 주전으로 뛴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상대팀 센터를 수비할 때 빛을 발한다. 리바운드·블록슛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해낸다. 그는 프로농구 14시즌 동안 평균 11분5초를 뛰며 3.2점 1.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창수 하면 서장훈(37·전자랜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맞대결도 자주 펼쳤고, 서장훈의 목을 다치게 했다는 오해도 있다.
"1994년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장훈이가 우리 팀(삼성전자)과 경기에서 목을 다쳤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나 때문에 장훈이가 다쳤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에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장훈이가 다칠 때 난 반대편에 있었다. 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장훈이 목 부상이 언급돼 미안할 뿐이다. 이제 이 인터뷰를 끝으로 더 이상 그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
실제 이창수와 서장훈은 친한 선후배 관계다. 20일 은퇴식 때도 서장훈이 코트에 나와 이창수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간스포츠 1면에 내 이름이 나왔다. 1990년 12월 중순쯤이었다. 경희대 재학 중 동국대와의 경기에서 25리바운드를 잡아내 한국 최다 기록을 세웠다. 다음날 지하철을 탔는데 내 얼굴과 이름이 1면에 나온 신문을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 깜짝 놀랐다. 아직도 집에 그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 허재·이충희 등 유명한 선배님들만 나오는 1면에 내가 나오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웃음)."
-지도자가 되면 '제2의 이창수'를 키울 것인가.
"절대 아니다. 난 '제2의 서장훈'을 키우겠다. 철저한 관리와 프로의식, 그리고 뛰어난 실력으로 똘똘 뭉친 국보급 센터를 발굴하고 싶다. 토종 센터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선수를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다."
김환 기자 [hwan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