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방송가에 재벌가를 다루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눈길을 끌고 있다. SBS 월화극 '마이더스'와 MBC 수목극 '로열패밀리', 그리고 27일 종영하는 MBC 주말극 '욕망의 불꽃'이 대표적이다. 평범한 여성이 '왕자님'과 이어지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을 위해 재벌을 등장시켰던 과거 작품들에 비해 재벌가 내부의 암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흥미를 자극한다.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고 시청자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장치가 아니라 드라마 자체의 주요소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과장된 재벌 2세의 모습보다 현실적인 재벌가의 모습을 묘사해 호평받고 있다. 변화된 '재벌 드라마'의 이면을 살펴봤다.
▶장남 대신 차남, 딸도 후계자로 부각 요즘 '재벌드라마'들은 재벌가 장남을 절대권력의 소유자로 그리지 않는다. 재벌가에 있더라도 형에게 밀려 푸대접을 받는 주인공들이 주로 등장했던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여성들이 후계자로 묘사되는 것도 달라진 부분이다. 아들 위주의 후계경쟁에서 딸들이 반란을 일으킨 셈.
이같은 사례는 최근 방송중인 세 편의 드라마에서 일괄적으로 드러나는 공통점이다. '마이더스'는 아예 시작부터 가문의 장남인 최정우가 그룹 후계자 경쟁에서 이탈된 것으로 묘사했다. 오히려 차남인 윤제문이 차기회장후보로 공공연히 지목된 상태에서 동생 김희애의 도전을 받고 휘청거리게 된다. '로열패밀리' 역시 마찬가지. 극중 그룹 회장의 큰 안들 안내상은 일찌감치 동생에게 유력자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동생의 사후 회장은 모든 가족들이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수 있게 고루 기회를 준다. 현재까지 회장에게 좋은 점수를 따고 있는 인물은 막내딸 차예련이다. '욕망의 불꽃'도 회장 이순재가 큰아들 대신 셋째아들 조민기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큰 아들은 허풍이 세고 허황된 욕심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허울뿐인 회장 자리를 주지만 실제적인 권력은 휘두르지 못한다.
▶재벌2세 아닌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 주인공 캐릭터도 변했다. 주로 재벌가 내에서 촉망받거나 혹은 힘들어하는 남자가 재벌소재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왔던 게 과거 드라마들의 패턴. 하지만 최근작들은 외부에서 재벌가로 들어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마이더스'의 주인공 장혁은 고문변호사로 재벌가에 들어가 후계자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김희애와 손을 잡는다. 권력과 돈의 힘에 매료돼 재벌가로 들어왔다가 과거의 삶과 현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로열패밀리'의 지성도 재벌그룹 변호사다. 이미 사망한 그룹 후계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염정아를 재벌집안의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이 두 작품이 똑같이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과거 드라마에서 주로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는 멘토 역할에 그쳤던 변호사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평범한 인물이 재벌가로 들어온다는 설정은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 주인공 신은경은 신분상승을 위해 치밀한 계획하에 재벌집안의 며느리가 된 인물이다. 재벌가에서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친인척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판타지 빼고 리얼리티 부각 인간미와 리얼리티가 부각된 것도 바뀐 점이다. 과거 드라마들은 재벌들이 돈 쓰는 모습 등 화려한 외형을 강조해 시선을 자극했다. '꽃보다 남자'는 재벌들의 모습을 극히 과장되게 그렸고 '신데렐라 스토리'의 대표적인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도 재벌가 주인공을 '완벽남'으로 묘사했다. 연인을 위해서라면 못하는 게 없는 돈 많고 능력있는 '왕자님'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 배경을 재벌로 설정한 것. 볼거리가 풍부해지고 판타지를 자극하기 때문에 시청자를 끌어당기기에 좋은 소재로 쓰였다. 하지만 유사 드라마들이 자꾸 나오면서 진부한 소재로 전락했다.
반면에 최근작들이 재벌가를 소재로 하면서도 '또 재벌이냐'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치밀한 구성 때문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재벌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디테일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말. 웃는 얼굴로 형제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재벌가 자녀들의 속내도 잘 묘사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방송계 한 관계자는 "재벌 소재 드라마들은 아예 기업드라마가 되든지 아니면 뻔한 내용의 멜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작들은 재벌가를 집중 해부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다. '실제로도 저럴 것 같다'는 생각과 향후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는 것 자체가 잘 만든 대중드라마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정지원 기자 [cinezz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