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곤(58)은 장애인 탁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곧 환갑이지만 아직도 탁구 라켓을 손에 감고 있다. 경추부상을 입은 그는 손가락을 오므릴 수 없어 라켓을 압박붕대로 감아 고정한다. 1일 서산 종합운동장 체육관에서 열린 서산시장배 장애인 탁구대회에 참가한 그는 쑥스러운 듯 "생활체육대회에는 잘 나오지 않는데"라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1988년 서울 패럴림픽 2관왕을 시작으로 2004년 그리스 대회까지 다섯 대회 연속 금메달을 따냈다. 그가 23년 동안 딴 패럴림픽 메달은 금메달 7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다. 한국 장애인 탁구는 이해곤을 앞세워 20년 동안 휠체어 탁구의 강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해곤은 6.25전쟁이 끝난 1953년 10월 5남 3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180cm에 74kg. 20대 초반의 그는 건강했다. 병역의무를 위해 공군 입대를 결심했다. 당시 남산에 있던 병무청을 찾은 그는 공군 입대 지원서를 찾았지만, 담당 병사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때 해병대 입대 담당관이 그 옆에 찾아왔다. "해병대에 오면 32개월만 근무하면 된다. 공군보다 8개월이 짧다"고 그를 설득했다. 이해곤은 "남자로 태어났으니 해병대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해병대에 입대 지원서를 냈다.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바꿔놨다. 한국 장애인 탁구의 미래까지.
이해곤은 5대 1의 경쟁을 뚫고 해병대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남자답게 다녀오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가 입대할 때는 남·북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1968년 1월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위해 침투했다. 김신조 목사는 생포되고 29명은 총격전 끝에 죽었다. 1명만 살아서 북한으로 달아났지만 박 대통령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4공화국은 특수부대를 만들어 북한으로 침투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이해곤도 해병 북파특수 공작대인 MIU503(일명 마니산 까치부대)에 차출됐다. 그는 "실미도 부대는 죄수들을 중심으로 만든 부대였지만, 우리는 해병대 엘리트 요원으로 이뤄진 특수부대였다. 실미도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며 "목표는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의 목을 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70년대 남북 적십자 회담 등으로 화해무드가 되며 작전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래도 MIU503부대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이해곤은 야간 특수훈련을 하다 낭떠러지에서 굴렀다. 목뼈가 부러졌다. 병상에 누운 채 국군통합병원에서 보훈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생활도 끝났다. 막내아들이 반신불수로 돌아오자 고혈압을 앓고 있던 아버지는 화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이해곤도 좌절하며 6년 병상에 누워서 세월을 허비했다. 그런 그를 일으킨 것은 탁구였다. 선교사로 찾아왔던 모우숙(한국명) 씨가 그에게 재활운동으로 탁구를 권했다.
그는 "처음에는 재미도 없고 도망도 많이 쳤다. 당시 여고생 선수들과 탁구를 치면서 실력이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8년간 맹훈련 끝에 서울 패럴림픽에 나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가능성이 보이니 국가에서도 장애인 탁구에 많은 지원을 해줬다. 23년이 지난 지금 한국 장애인 탁구연맹은 1380여 명의 등록선수를 가진 큰 단체가 됐다. "장애인 탁구가 발전한 것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한 이해곤은 "나이가 들어 힘은 많이 떨어졌다.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 도전을 해볼 것이다"며 활짝 웃었다.
서산=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