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보다 애 키우기가 더 어려워요."
여자 농구계의 '레전드' 전주원(신한은행·39)에게도 어려운 일이 있다. 바로 '육아'다. 전주원은 1년 중 대부분을 농구코트에서 보낸다. "팀이 안산에 있어서, 나오기 쉽지 않아요. 365일 중 60일 가량만 가족과 함께 합니다." 그만큼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정수빈(8)에게 미안함이 크다.
비시즌을 맞아 '딸바보' 전주원이 좌충우돌 육아 24시에 돌입했다. 요리는 자신 없어도 딸과 놀아주기 만큼은 이 세상 최고다. 청소는 서툴러도 수빈이 교육만큼은 만점이다. 자신의 분신. 세상 전부인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없이 순했다. 우리 엄마의 눈이었다. AM 6:50 전주원, 엄마로 돌아오다'엄마 전주원'의 하루는 새벽 6시 50분부터 시작된다. 합숙소라면 아직 잠자리에 있거나, 오전 운동을 할 시간. "수빈이 학교 보내는 날에는 '초긴장'상태에요. 아무리 피곤해도 벌떡 일어나죠."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엄마는 부엌으로 달려간다. 냉동실에서 하얀색 봉투를 꺼낸다. 노릇노릇하게 눌린 누룽지가 가득하다. "한꺼번에 만들어서 얼려둡니다. 수빈이 아침식사로 한 조각씩 끓여줘요."
현재시간 7시 10분. 엄마는 재빨리 딸 방으로 이동한다. "우리 딸, 정수비니. 일어나!" 언제 들어도 귀에 '착착 감기는' 엄마 목소리. 딸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화장실로 데려가 양치질을 시키고, 세수를 도와준다. "구석구석 깨끗하게 '치카치카' 해야지." 농구코트에서 보여줬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사라 진지 오래다. 잘 다려놓은 교복을 입혀서 딸 손을 잡고 아파트 밖으로 나온다.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행복하게 보내다 와. 딸!"
AM 8:30 청소시작!등교 전쟁이 지나간 자리, 청소가 남았다. 설거지를 한 뒤 전날 널어놓은 빨래를 갰다. "사실 꼼꼼하게 집안 정리를 하는 편은 못돼요. 오히려 남편이 더 청소에 신경 씁니다." 오전 10시. 비로소 엄마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엄마 역할은 아직도 초보입니다. '워킹맘'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실 거에요." 그가 미혼인 기자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수빈이는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아이다. 전주원은 2003년 수빈이를 임신한 채 일본 센다이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 나갔다.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결정짓는 중요한 대회였다. "수빈이는 고된 훈련을 견딘 아이에요. 유난히 속이 좋지 않아서, 어렴풋이 '이상하다'라고 느꼈는데 경기 후 테스트를 해보니 임신 4주였어요." 엄마는 자식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인다. "후배가 아기 백호가 품으로 뛰어 들어오는 태몽을 대신 꾸었어요. 물론 꿈과 달리, 수빈이는 뱃속에서 얌전하고 착한 아기였어요. 말썽꾸러기들은 배 밖으로 발자국이 찍히게 발로 찬다잖아요? 호호호…." 에피소드가 차고 넘친다.
PM 1:30 수빈이가 돌아왔다"엄마, 나 수두 걸렸대." 학교에서 돌아온 수빈이 얼굴에 울긋불긋 열꽃이 올라왔다. "학교 같은 반 친구한테 옮았나봐요." 전주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딸은 다음날 학교에 가지않아 좋기만 하다.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 수빈이가 보는 엄마 요리 실력은 어떨까. "음…. 솔직히 쏘쏘(so so.).그냥 그래요. 히히…." 엄마도 요리 실력을 '순순히' 인정한다. "다행히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어요." 오늘 메뉴는 수빈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빔국수.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가 어쩐지 주객(主客)이 바뀐 느낌이다.
"잠깐. 냄비가 어딨지?(엄마)" "엄마도 참. 그거 저 맨아래.(딸)" "아! 여깄다. 그러면… 앞치마가 다용도실에 있지?(엄마)"
새콤한 초고추장에 조물조물 면을 무치던 전주원이 말했다. "남편이 1997년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땐 미국에서 삼계탕도 끓이고 했죠. 이번 주 안에 수빈이한테 떡볶이 해 주는 게 목표입니다."
아무렴 어떠랴. 비빔면 먹는 수빈이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 가득했다. "엄마는 유명인이니까요. 제가 다 이해해요. 그래도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요."
전주원의 농구인생전주원은 서울 선일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공을 처음 만졌다. 농구경력만 28년째. 선일여고 3학년 시절 나고야 주니어 아시아농구선수권(ABC)대회서 10년 만에 한국의 우승을 이끌며 간판 가드로 떠올랐다. 1990년 당시 최고 몸값인 1억5000만원에 현대산업개발에 입단했다. 이후 92년 ABC대회, 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게임, 99년 시즈오카 ABC대회에서도 챔피언에 올랐다.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4강신화를 이루며 한국여자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여자농구 올림픽 출전 사상 첫 트리플 더블 기록(10득점·10리바운드·11어시스트·한국 69-56 쿠바)도 세웠다. 두 차례 무릎 수술로 연골이 없는 상태지만 그는 불혹의 나이에도 프로농구 정상에 올랐다. 소속팀 신한은행을 정상으로 이끌며 한국 프로 스포츠 사상 첫 5시즌 연속 통합 우승에 힘을 보탰다. 7시즌 연속 차지했던 어시스트왕은 올 시즌 이미선(평균 7.07개)에게 넘겨줬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현재 은퇴 시점을 고민 중이다.
서지영 기자 [saltdol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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