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억할 만한 연예계 사건 중 하나는 '슈퍼스타K' 허각의 탄생이다. 배관공 출신의 허각이 130만 지원자 중 ‘깜짝 우승’을 차지하며 스타로 떠올랐다. 한 마디로 인생역전! 많은 사람이 스타 탄생을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런 기적은 지금부터 52년 전에도 있었다. '슈퍼스타K'의 원조라 해도 되겠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허각의 대선배는 신성일인 셈이다. 나는 누구든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난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집이 폭삭 망하고, 빚쟁이들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었다. 경북고 친구들의 90% 이상이 서울대로 진학한 걸 본 후에는 '에라, 대구를 떠나자'는 마음 하나 밖에 없었다. 졸업 직후 상경해 서울의 형님께 빌린 돈으로 청계천 7가쯤에 2층 다락방을 하나 얻어 살았다.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은 똥오줌을 방에서 그대로 밑으로 갈겼다. 호떡 장사도 그 때 시도한 것이다. 반면 대구 빚쟁이들을 피한 어머니는 서울 가회동의 빈민촌에서 몸을 숨기고 계셨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우연히 찾아왔다.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는 충무로와 명동이었다. 난 별로 할 일이 없었지만 그 곳을 걸어다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충무로 1가의 중국대사관에서 중앙우체국 사이에 '기쁜소리사'라는 음향기기사가 있었다. 최신 음향기기를 구경할 수 있는 그 곳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지금의 프라자호텔 뒤쪽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집결지였다.
그 날도 난 그냥 충무로 기쁜소리사 부근을 걷고 있었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맞은 편에서 모자부터 발끝 구두까지 모조리 하얀 컬러로 치장한 일명 '마카오 신사'가 걸어왔다. 몸에 걸친 건 죄다 마카오 수입품으로 최고 신사들의 패션이었다. 당시는 GNP가 200불이 안되던 시절이다. 그 신사는 양쪽에 보디가드같은 사람 두 명을 양쪽에 끼고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고교 동창 손시향이었다.
손시향은 여러모로 나와 똑같았다. 나와는 2년이나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그는 1950년대 피아노가 있던 대저택에 살던 대구의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손시향은 점심 시간이면 우리에게 팝송을 소개하곤 했다. 매력적인 여배우 도리스 데이가 출연한 영화 '카라미티 제인'(1953년)의 타이틀곡 '시크릿 러브'를 칠판에 영어로 써서 가르칠 정도였다.
그의 집안도 우리처럼 폭삭 망했다. 어머니가 계모임 하다가 잘못되는 바람에 고위 세무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자살했다. 그 역시 평지풍파를 겪으며 수원에 자리한 서울 농대에 들어가는데 그쳤다. 음악적 재능이 있던 손시향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가요계에 뛰어들어 성공 가도를 달렸다. 나 역시 그의 노래 '검은 장갑'을 알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의 본명은 손용호였다. 나는 크게 불렀다. "용호야!"
그가 나를 알아 보았다. 내가 기대했던 장면은 최소한 서로 얼싸안고 "니, 잘 살았나? 친구야!"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각별한 사이였던 데다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나다니. 그런데 그는 멈춰서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