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선수는 퀵모션이 너무 느립니다. 저 속도로는 주자를 잡아낼 수가 없어요.”
“다 좋은데 주자 견제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약점입니다. 한국야구에서 성공하려면 지금보다 퀵모션을 더 빠르게 가져가야 합니다.”
한번쯤 야구중계를 보다 위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 프로야구에 ‘발야구’가 대세가 되면서 퀵모션은 매우 흔하게 쓰이는 말이 됐다. 퀵모션의 정확한 표현은 슬라이드 스텝(slide step)으로, 주자 있는 상황에서 투수가 투구 동작을 작고 재빠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방송에서 쓰이는 퀵모션은 일본식 야구 용어로, 잘못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론상으로 투수가 슬라이드 스텝으로 공을 던져서 포수에게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1초 3 이내라면,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투수진의 슬라이드 스텝 연마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새로 영입한 외국인 투수에게도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게 빠른 슬라이드 스텝이다. 어떤 외국인 투수든 한국무대 데뷔전을 치르고 나면, 느리고 큰 투구폼에 대한 지적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구위나 컨트롤이 어떻든 빠른 슬라이드 스텝 없이는 한국야구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위협도 난무한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슬라이드 스텝의 원조격인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이 동작에 대한 반론이 적지 않다. “슬라이드 스텝으로는 정상적인 투구를 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특히 바이오메카닉 피칭 이론가들은 슬라이드 스텝이 투수의 컨트롤과 공의 위력을 떨어뜨린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일반적인 와인드업이나 스트레치 동작에서 투수는 다리를 들어 올리는 리프팅과 다리를 앞으로 뻗는 스트라이드, 공을 손에서 놓는 릴리스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슬라이드 스텝은 이 중 다리를 드는 리프팅 단계를 생략한다. 이렇게 되면 투수의 몸이 정상적인 동작보다 빠른 타이밍에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 와인드업 동작이라면 다리가 땅에 닿을 시점에 앞으로 나와 있어야 할 투수의 팔이 여전히 뒤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러싱(rushing)이라 한다.
러싱 현상이 발생하면 투수의 팔은 평소보다 늦은 타이밍에, 낮은 각도로 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자연히 공이 너무 높게 제구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팔각도가 낮기에 커브 등 변화구의 각도 정상적인 투구폼으로 던질 때보다 밋밋하게 들어가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이 계속 반복되면 투수의 어깨와 팔에 무리를 가져온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리프팅의 생략으로 빠른 볼 구위가 줄어든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대개 투수가 지닌 장점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빠른 슬라이드 스텝을 자랑하는 투수는 주자를 효과적으로 묶어두는 대신, 구위 측면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반면 투구폼이 크고 느린 투수라면 많은 도루를 허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대신에 뛰어난 구위나 변화구의 큰 각도를 얻을 수 있다. 만일 후자에 해당하는 투수에게 무조건 빠른 슬라이드 스텝으로 던질 것을 강요한다면, 도루허용은 줄어들지 몰라도 본래 가진 장점인 구위나 컨트롤을 잃게 될 위험이 따른다. 단점 하나를 고치려다 여러 개의 장점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얘기다. 슬라이드 스텝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일본의 명투수 구와타의 말처럼 “도루 막으려다 더 큰 위기를 자초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뛰는 야구의 득세가 한국 프로야구만의 현상인 것도 아니다. 미국 프로야구 역시 최근에는 홈런의 감소와 투고타저로 인해 다시 기동력 야구가 중시되는 흐름이다. 메이저리그 경기의 라인업을 봐도 대부분의 팀에 언제든 2루를 훔칠 수 있는 빠른 발을 보유한 선수들이 즐비하다. 그런 면에서 외국인 투수들의 투구폼이 느린 이유가 “미국은 한국과 달리 뛰는 야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1990년대 메이저리그에나 통용될 이야기다. 최근의 흐름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미국 출신 투수들의 상당수가 국내에서 슬라이드 스텝 문제로 곤혹스러워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한국과 미국의 야구 문화 차이에서 기인한다. 미국야구는 선수의 단점을 뜯어고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투수의 상대는 주자가 아닌 타자”라는 기본에 충실하다. 때문에 투수가 슬라이드 스텝 때문에 많은 도루를 허용하더라도, 자기 공을 던져서 타자를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다면 무리하게 빠른 투구폼을 강요하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포수가 빠른 풋워크와 강한 송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투수가 효과적으로 주자를 베이스에 묶어두고, 포수가 빠르고 강한 송구로 2루에 던질 수 있다면 느린 투구폼의 단점은 상당부분 커버할 수 있다. 이런 차이를 제쳐두고 외국인 투수에게 무작정 슬라이드 스텝을 익힐 것을 강요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실제로 국내 적응에 실패하고 퇴출된 외국인 투수 중에는 좋은 공을 가지고도 퀵모션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기 투구폼을 잃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프로 출신의 한 고교 코치는 “외국인 투수들이 공 빠르고, 제구력 좋고, 거기에 퀵모션까지 빠르면 왜 한국에 와서 뛰겠나?”라고 힐난했다. “그 선수들이 어딘가 한두 군데 약점이 있으니까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거라고 봐야 한다. 왜 좋은 점이 많은 선수를 데려다 놓고 완벽하게 만들려다 나쁜 선수로 만드는 우를 범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지난해 프로야구 최고의 외국인 투수는 히메네스(두산)였다. 히메네스가 한 해 동안 허용한 도루는 모두 27개로 전체 2위. 그 뒤로 사도스키(25개), 이재곤(22), 고원준(20), 콜론(19), 김광현(17) 등이 도루허용 부문 상위권을 형성했다. 하나같이 지난 시즌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들이다. 만일 이들이 번개같은 퀵모션으로 도루를 막아냈다면, 더 나은 성적을 기록했을까. 맹목적인 퀵모션 타령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투수의 상대는 주자가 아니다. 투수의 상대는 타자다.
<야구라> 배지헌 (http://yagoo.tistory.com/)
* 위 기사는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