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상파울루는 아침부터 비가 제법 많이 왔다. 싸늘함. '삼바와 정열의 나라' 브라질과 쉽게 연관되지 않는 느낌이다. '축구 황제' 호나우두(35)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날이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종교이자 삶의 이유다. 축구가 사람·도시·나라를 지배한다.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면 여기 저기에서 호나우두의 축구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나온다. 그가 다섯살 쯤 됐을 때일까. 축구공 하나로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 표정은 성인으로 자란 뒤 호나우두의 얼굴과 겹쳐진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가 만약 준결승에서 독일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면 월드컵을 놓고 그와 격돌했을 것이다. 머리 앞 부분만 남긴 괴상한 헤어스타일로 결승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두 골을 몰아넣으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그 뒤로 강산이 변할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는 은퇴를 선언했고, 나는 이곳에 와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고 해야할까.
오후가 되자 비가 멎었다. 도시는 황제의 퇴위식 준비로 분주하다.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문구가 거리 곳곳에 걸렸다. 호나우두가 그라운드에서 선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상파울루 파카엥부 경기장은 인산인해다. 1940년에 지어져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이 치러진 곳. 1945년 공산주의 혁명가 프레스테스의 환영집회가 열려 10만 인파가 모였던 곳. 오늘 이곳에서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준비되고 있었다.
입장권은 일찌감치 동이 났다. 일반석 입장권이 150레알(약 10만원)의 고가였음에도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나와 일행도 장당 400레알(약 27만원)을 주고 암표를 살 수밖에 없었다. 오후 9시. 경기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빈자리 없이 관중석이 가득 찼다. 관중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서민층인 흑인은 비싼 입장료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전반 내내 몸을 풀던 호나우두가 전반 30분 출격 명령을 받고 하프라인으로 걸어나가자 관중석이 들썩였다. 전반 21분 선제골을 터뜨린 프레드가 교체를 위해 걸어나왔다. 프레드는 두 팔을 뻗어 위 아래로 흔들며 경배의 뜻을 표시했다. 등번호 9번 노란 유니폼을 입은 호나우두가 피치 안으로 들어서자 관중석에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대형 현수막이 펼쳐졌다. 경기장의 열기는 그가 공을 잡을 때마다 후끈후끈 증폭됐다. 관중들은 호나우두에게 패스하라고 소리를 쳤다. 동료들도 호나우두에게 영광스러운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살은 붙었지만 예전의 감각은 살아있었다. 3차례 정도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골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전반전이 끝난 뒤 하프라인 부근에서 성대한 은퇴식이 열렸다. 호나우두는 하프타임에 브라질 국기를 등에 두르고 그라운드를 돌면서 기립박수를 보내는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나와 함께 울고 웃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가 후반 교체돼 나오자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브라질의 패스 미스가 연거푸 나왔고 점유율에서도 루마니아에 밀렸다. 브라질은 지난해 월드컵이 끝난 뒤 공격 축구를 강조하는 마누 메네세스 감독에게 지휘봉을 건넸지만 아직은 틀이 갖춰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 대표팀과 마찬가지로 왼쪽 측면 수비수 문제로 고민이 깊다. 호베르투 카를로스가 은퇴한 뒤 대체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메네세스 감독은 세대교체를 단행했지만 브라질 특유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축구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야유를 퍼붓던 관중들은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경기는 1-0 브라질 승리로 끝났지만 분위기는 진 것 같았다. 황제는 떠났고, 브라질 축구는 아직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