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 때 일이다. 뜨거운 여름날, 반팔 와이셔츠를 사러 백화점에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반팔 와이셔츠가 없었다. 같이 간 지인에게 그 이유를 묻자 "법사님, 미국에선 반팔 와이셔츠가 필요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에어컨이 너무 세거든요"라고 말했다.
살다보니 정말 그랬다. 건물만 들어가면 강력한 에어컨 바람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들었다. 그러다보니 건물 안팎의 온도 차이가 심했다. 건물 밖은 열사병이 날 정도로 땀이 줄줄 흐르는데, 건물 안은 에어컨 때문에 입이 덜덜 떨렸다. 얼마 못가 나는 냉방병이 걸리고 말았다. 여름인데도 기침을 달고 살았다. 뉴욕에서 보낸 첫 여름은 에어컨으로 인해 몸살을 앓아야 했다.
요즘 우리나라는 에어컨이 없으면 살기 힘들어졌다. 고온다습한 날씨에 에어컨까지 없으면 더위가 턱 밑까지 차오른다. 집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찾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불과 50~6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에어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나름의 피서법은 있었다. 여름이면 수박을 사서 시원한 우물물에 담가놨다가 온 가족이 나눠 먹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시원함은 오리지널 그 자체였다. 또 삼베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도 그다지 덥지 않았다. 오히려 껴입어야 더 시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에어컨, 선풍기, 냉장고 없이도 여름을 시원하게 보낸 옛 시절이 신기하고 그리워진다.
1990년대 중반 '문제적 인간, 연산' 공연 당시 일이다. 공연 내내 사고가 잦았다. 조명 장치가 떨어지고 세트가 부서지는 등 크고 잦은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하자 연출가는 내게 조언을 구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공연 전에 철저히 점검하는데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가 계속 생기니 정말 미치겠습니다."
공연장 안을 영적으로 살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공연 중인 극장은 6.25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현장이었다. 영가들은 구명시식으로 자신들의 천도를 부탁하며 아울러 "극장에 에어컨 좀 제발 켜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우리들은 에어컨 바람이라면 질색이란 말입니다"라며 신신 당부했다.
한 여름 찜통더위에 공기도 통하지 않는 극장에서 에어컨을 틀지 말라니. 이건 공연을 올리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영가의 말을 연출가에게 전하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과연 우리 공연이 잘 될까요? 에어컨 없는 극장에 관객이 오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구명시식 후 에어컨 없이 공연을 올리자마자 객석은 만원사례였고, 공연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도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구명시식이면 한 번도 틀지 않던 에어컨을 몇 해 전부터는 잠깐씩 틀고 있다. 영가들이 에어컨 바람을 싫어 한다는 게 정설이었지만 요즘 영가들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엔 요절한 여자 스타의 구명시식을 올리는데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법사님, 너무 더워요. 빨리 에어컨 좀 틀어주세요"하면서 연신 손부채를 했다.
옛날 영가들은 에어컨 바람에 익숙하지 않아 싫어했지만 요즘 영가들은 에어컨 없이 구명시식을 할 수 없다. 영가는 육신만 없을 뿐이지 정서는 그대로다. 여름이면 에어컨, 겨울이면 히터를 틀어야 구명시식을 할 수 있다. 만약 '문제적 인간, 연산' 공연이 다시 올려 진다면 이번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도 괜찮을 듯싶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