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에 우스갯 소리로 떠들던 '생방송 드라마'가 현실로 드러났다.
월화극 '스파이 명월' 주인공 한예슬이 열악한 제작환경을 이유로 돌연 14일 미국으로 떠나자 자동적으로 15일 방송이 결방됐다. 한예슬 사태는 결국 3일 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국내 드라마 제작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무책임한 한예슬의 태도는 질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배우 한명이 불참했다고 당장 내보내야할 방송이 펑크났다는 것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초유의 사태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한예슬이 삼일만에 촬영장에 복귀해 드라마 방송 중 주연배우 교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드라마 제작 관행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을 벌어지게 만든 열악한 제작환경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봤다.
▶쪽대본이 대체 뭐길래.돌연 15일 미국 LA공항으로 떠난 한예슬은 “드라마 제작환경이 너무 힘들었다. 후배들이 나 같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해 고충을 털어놨다. 열악한 제작환경의 중심에는 쪽대본이 자리잡고 있다.
이젠 방송가에 종사하지 않는 일반인도 다 아는 쪽대본은 한국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일상적인 단어가 돼버렸다. 보통 작가가 완벽하게 마무리 된 대본을 책의 형태로 제본해서 나눠 줘야하지만 촬영을 앞두고도 대본이 완성되지 않으면 급한대로 우선 각각의 신을 낱장의 종이로 전달하게 된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을 꿰뚫기는 커녕 그날 대본을 받아 그날 소화하는 사실상 생방송 모드로 들어가게되면 출연배우의 육체적ㆍ정신적 중압감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개연성있는 연출과 깔끔한 편집도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이렇게 열악한 쪽대본 시스템은 배우의 부상이나 사고 등 돌발상황이 일어날 경우 곧바로 방송 차질로 이어진다. MBC 수목극 ‘넌 내게 반했어’는 여주인공 박신혜의 교통사고로 지난달 21일 결방됐고, 올 1월에는 SBS 월화극 ‘아테나:전쟁의 여신’이 정우성의 부상으로 역시 결방됐다.
▶2주 동안 한숨도 못잤다?한예슬 헤어담당 코디는 16일 자신의 트위터에 "한예슬과 제작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으로서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다"며 한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예슬은 2주 동안 밤을 새우고 기어가듯 집에 가 걸을 힘도 없어 잠시 소파에 기댔다가 기절한듯 잠을 자고 뒤늦게 촬영장으로 향한 적도 있을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 며칠씩 이어지는 밤샘 촬영은 한예슬 뿐 아니라 드라마 제작현장의 오랜 관행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인터뷰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드라마 찍으면서 24시간 동안 한숨도 못잔 것" "일주일 동안 집에도 못들어가고 촬영한 것"등을 예로 든다.
한 매니저는 “미니시리즈에 투입되면 1주일에 7일 촬영하는 것은 이제 기본"이라며 "그나마도 스케줄이 미리 나오지 않아 동선을 짜는데도 어려움이 많다"고 호소한다. 그날 방영분을 그날 촬영하는 생방송 촬영도 이젠 새로울 것이 없는 관행이 되어버렸다.
지난 6월 종방한 SBS '싸인'은 방송 마지막날까지 촬영하고 편집해 전파에 내보내다 칼라바가 뜨는 웃지못할 사고를 내기도 했다.
▶살인적인 스케줄?완성도 높기로 유명한 미국 드라마에는 일일극이 없다. 심지어 미니시리즈도 일주일에 1회씩만 방영한다. 일본도 50분 가량의 미니시리즈를 주 1회 방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월화극, 수목극처럼 1주일에 2회 방영이 기본이다. 90년대 이전에는 주1회 방송하는 '주간 드라마'가 일반적이었지만 지상파 3사의 시청률 경쟁으로 주2회 방송이 정착됐다. 주1회 방송으론 시청자 집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 심지어 드라마 1회당 방송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과거 50~60분이었던 게 이젠 70분까지 늘었다. 결국 영화 한편의 분량을 1주일에 몰아 찍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배우는 물론 스태프와 작가 모두에게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2000년도 들어서면서 드라마 프로덕션이 생기는 등 외주제작이 늘고 광고와 협찬을 통한 수익 경쟁이 심해진 것도 한 이유. 고영탁 KBS 드라마국장은 "우리나라 제작 환경이 다른 나라보다 힘들다"고 인정했다.
▶왜 미리 만들지 못하나.그러면 드라마를 미리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까지 100% 사전제작으로 만들어진 SBS '파라다이스 목장'과 MBC '로드넘버원' '친구' 등은 완성도는 높았지만 시청률에서는 참패했다.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청자가 끼여들 여지가 없어 시청률엔 마이너스가 됐다"고 전한다. 시청률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송사가 생방송 드라마를 선호하는 아이러니한 이유이기도 하다. MBC 박성수 드라마 부국장은 “그동안 사전 제작한 드라마는 다 망했다”며 “우리나라 시청자는 드라마에 개입·소통하고 싶어하는데 사전제작 드라마는 그것이 안 된다”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사 제이에스픽쳐스 이진석 대표는 “확실한 대안은 50%가량 사전제작을 한 다음에 방영을 시작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미니시리즈를 주 1회만 방영하는 방식은 지상파 3사가 합의를 한다면 대안이 될 수도 있을거 같다"고 전했다.
유아정 기자 [porol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