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과 배우가 실제 연인으로 찍은 영화는 그 호흡이 남다르다. 내가 최고로 꼽는 영화 '만추(晩秋)'(1966) 뒤에는 이만희 감독과 여주인공 문정숙의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타고난 영화감독과 타고난 여배우가 만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 감독과 문정숙은 서로 반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감독은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남자들도 반할 만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가졌다. 그는 배우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촬영장에선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다가와 배우에게 귓속말로 지도해주었다. 혼을 낼 때도 주먹을 살짝 흔들어 알밤 주는 시늉을 하며 "임마"라고 '귀엽게' 속삭였다.
문정숙은 서구적 얼굴이지만 천진난만하면서 조용한 전형적 한국 여인이었다. 약간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음성도 매력을 더했다. 여배우 중 노래를 가장 잘 불렀다. 문정숙이 최고 매력을 발휘한 영화는 '검은 머리'(64)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서 문정숙은 조직 보스인 장동휘의 정부로 등장한다. 그러나 보스 부하들에게 린치를 당해 맥주병에 오른쪽 눈을 찔린다. 문정숙은 머리를 내려 오른쪽 눈의 상처를 가린다.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그녀의 머리 스타일이 당시 여인들에게 유행이 됐다.
문정숙의 언니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북한 인민배우 문정복이다. 문정숙은 연극배우인 언니를 쫓아다니다가 자연스럽게 영화배우가 됐다.
이 감독과 문정숙이 감독과 여배우로 처음 만난 작품은 62년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그 때만 해도 단순하게 촬영 관계로 만난 감독과 여배우 사이였다. 이 감독이 영화적으로 나와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처럼, 여배우로는 문정숙과 찰떡궁합이었다. 이 감독 영화의 절반 정도가 문정숙 주연이다. 문정숙이란 여배우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알고, 그것을 최대한 영화에서 돋보이도록 한 사람이 이 감독이다. '만추'의 농익은 여자 주인공은 당연히 문정숙의 것이었다.
이 감독과 문정숙을 가장 잘 아는 배우 이해룡은 두 사람이 '검은 머리'를 통해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추측한다. 아마도 이 감독이 그 영화에서 문정숙에게 푹 빠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각각 배우자와 아이가 있었다. '천생연분인데 왜 이렇게늦게 만났는가'라고 한탄하는 안톤 체홉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남녀주인공과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두 사람의 관계를 좋지 않게 보았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말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동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데이트할 장소가 마땅히 없었다. 그들은 당시 뚝섬에 신혼살림을 차린 배우 이해룡의 집을 빌어 간간이 데이트했다.
문정숙은 남편과 갈라선 후 아이와 함께 약수동에서 살았다. 이 감독은 밤에 가끔씩 문정숙의 집을 찾아갔다. '만추' 촬영 막간을 이용해 문정숙은 내게 지난밤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미스터 신, 나 밤에 한 잠 못 잤어. 이 감독이 술 먹고 들어와 개가 짖는다고 발로 찼다고. '아저씨가 개 죽인다'고 우리 아이가 울고 고함지르는 바람에 힘들었어."
두 사람 사이에는 간간이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67년 전쟁 영화 '얼굴무늬의 사나이' 촬영 차 베트남에 3개월 가량 같이 로케이션을 갔다. 마지막으로 함께 한 작품은 74년 '청녀'다. 그 동안 다투고, 사랑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문정숙과 누구보다 친했던 엄앵란은 그들을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