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간관계는 정파를 초월했다. 야권 쪽에서 나와 막역했던 분으로는 김상현 현(現) 민주당 상임위원을 꼽을 수 있다. 김 위원이 내게 어찌나 공을 들였던지,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1960년대에는 온갖 행사장에 불려다녔다. 이후락·박종규·김형욱 등 청와대의 실력자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야권의 김상현 신민당 의원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67년 가을 무렵 신인 여배우 윤정희와 함께 영화 '강명화'를 촬영했다. 서울 돈암동 큰 길에서 미아리고개로 넘어가는 길가에 자리한 미아리 점성촌 입구에서의 밤샘 촬영이었다. 일제시대 기생 강명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말이 밤샘 촬영이지, 배우들에겐 정말 고달픈 환경이었다. 차도 없고, 통금이 있던 때라 배우들은 야간 촬영을 하면 집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추위에 떨면서 밤을 새워야 했다.
그 날도 모두들 찬 밤 공기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통금이 임박했을 무렵, 포장마차 하나가 덜렁덜렁 흔들리며 촬영장으로 다가왔다. '저게 무슨 포장마차인가' 싶어 궁금하게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포장마차 주인과 함께 포장마차를 몰고 오는 사람이 김상현 의원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형님, 거기 웬일이세요?"
김 의원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자네들 밤 새는데 도와줄 건 이것 밖에 없어. 오뎅 국물이나 먹어봐."
김 의원은 배우들을 먹이려고 포장마차와 그 주인까지 통째로 빌려온 것이다. 이 얼마나 정겨운 일인가. 당시 촬영장 야식으로는 라면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63년 9월 등장한 삼양라면이다. 노란색 봉지의 중앙에 닭이 그려져 있었으며, 닭 몸통은 투명해 봉지 안의 꼬불꼬불한 면발이 볼 수 있었다. 그 때 라면 가격은 10원이다. 물 붓고, 김치 썰어 넣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참치 통조림을 넣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나는 삼양라면의 설립자인 전중윤 회장도 잘 알았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전 회장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일본의 삿포로 라면을 모델로 한국에도 라면을 들어오기로 결심했다. 그는 회사 설립 당시 정보부장이던 JP(김총필 전 총리)를 찾아가 라면을 직접 끓여주고 지원을 받아냈다고 한다.
삼양라면의 공장은 도봉산 입구에 자리했다. 나는 공장이 생기고 난 후 1~2년 안에 배우협회 소속 배우들과 함께 그 곳에 견학을 갔다. 초창기 삼양라면 공장은 약 15m 정도 되는 몇 개의 레인에서 기름이 끓고, 그 안으로 면이 지나가면서 튀겨지는 시스템이었다. 일종의 수영장 같은 느낌이었다. 삼양라면은 70년 11월 지방에 처음으로 이리공장을 열었다. 이리공장은 전 회장이 처음으로 피난 온, 바로 그 자리였다. 그 날 행사 때도 내가 참석해 축하해주었다.
김 의원은 포장마차 사건 후 3년만에 우리 집(이태원 181번지)을 찾아와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번에는 DJ(김대중 대통령)와 함께였다. DJ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YS(김영삼 대통령)를 누르고 후보로 확정된 바로 다음날인 70년 9월 30일 야밤 중이었다. DJ가 70년 1월 24일 뉴서울호텔에서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 같이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싸워 나갈 것"이라며 7대(71년) 대선 도전을 공식선언할 때, DJ 대권 도전의 오른팔 역할을 한 사람이 김 의원이었다. 나는 그 날 "함께 정치하자"는 DJ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인간적으로도 배우들에게 정성을 바친 김 의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사진설명
1980년대 중반 서울의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 한 영화배우 신성일(오른쪽)과 김상현 현 민주당 상임위원.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