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년)의 주연 남궁원(왼쪽)과 윤일봉. 이 작품의 감독을 맡은 신성일은 절친한 선배 신영균·윤일봉·남궁원을 모두 출연시켰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년)의 주연 남궁원(왼쪽)과 윤일봉. 이 작품의 감독을 맡은 신성일은 절친한 선배 신영균·윤일봉·남궁원을 모두 출연시켰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70년 여름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의 이야기다.
당시 멋부리는 젊은이는 모두 볼링장에 모였다. 60년대 미8군볼링장·워커힐볼링장을 필두로 남산볼링장·충무로3가 오성볼링장·명동1가 신스볼링장·한국일보가 운영하는 한강볼링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남산볼링장은 레인을 깐 바닥이 훌륭했고, 후에 남산체육관으로 변모했다. 명동1가 라데팡스빌딩 2층에 자리한 신스볼링장은 선배 신영균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라데팡스빌딩 1층은 증권사였고, 지하는 선배 최무룡이 밤무대에 출연한 클럽이었다.
나를 비롯해 신영균·윤일봉·남궁원 등 사인방은 종종 저녁 시간 신스볼링장에서 어울렸다. 그 중에서는 내가 가장 잘 쳤다. 에버리지가 180을 넘었으니 말이다. 영화배우 중에선 후배 신일룡이 최고였다. 힘을 앞세워 퍼펙트 게임을 하는 실력자였다.
어느날 늦게 갔더니 세 분이 코너에 있는 스낵에 모여있었다. 신영균이 날 보더니 "저기 잘 치는 사람 있다"며 눈짓을 했다. 한 여인이 저쪽 레인에서 볼링을 하고 있는데 어딘가 낯이 굉장히 익었다. 서로 인사를 하게 됐다. 그 여인은 날 살피더니 "절 아시겠어요?"라며 미소 지었다. 난 우물쭈물 했다. 여인은 "절 닮은 분을 생각하고 계시죠. 김경오씨 아시죠?"라고 물었다.
김경오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으로 유명한 미모의 여류 인사였다. 세계여류비행사 모임의 회장직도 맡는 등 국제적인 활동도 했다. 큰 행사마다 유명인들 모일 때 인사를 해서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내 셋째 형이 파일럿이어서 더욱 각별한 느낌이 있었다. 그 여인이 김경오의 여동생이라니. 이름은 김영애라고 했다. 그 날 신영균을 빼고 남자 셋이 김영애와 어울려 볼링을 했다. 게임이 끝난 다음, 신영균이 "밥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김영애는 밥 먹으면서 자기 소개를 했다. 그 자리를 통해 김영애가 미국 USC(남가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여름 방학을 맞아 가족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영애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호수까지 공개했다. 외국 유학 생활을 하는 여인의 자유스러움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 가기 전 동아연극상 주연상을 받기도 하고, 동아라디오 방송에서 아나운서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첫 눈에 반했다. 김영애는 볼링 치는 모습도 아주 예뻤다. 국내 여인들은 엄앵란 때문에 감히 내게 접근을 못했다. 그러나 김영애는 아메리카니즘으로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저녁마다 신스볼링장에 모여 볼링을 친 후 저녁을 먹었다.
하루는 내가 부산에서 촬영을 하게 됐다. 3박4일 일정으로 그 날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내려가야 했다. 신스볼링장에 들렸다. 다른 형들은 코너 스낵에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나와 김영애만 볼링을 쳤다. 세 형들 중 윤일봉의 눈빛이 김영애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부산에 내려가면 그 여인을 윤일봉에게 빼앗길 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미스 김."
"네."
"오늘 마지막 비행기로 부산 내려가야 해."
나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했다.
"내일 오후 비행기 타고 5시 부산에 도착해. 극동호텔에 김영애라는 이름으로 예약해 놓을 테니 오라고."
김영애는 놀라기만 했다.
"네?"
나는 그녀가 반문할 틈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세 명에게 다가가 "형, 나 부산 가야해"하고 손 인사한 후 볼링장 출입구를 급하게 빠져나갔다. 그녀는 과연 올까? 난 내 운세를 시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