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의 에로스케치]
작년 이맘때였다. 여대생 둘과 섹스칼럼니스트들의 대담 자리를 일간스포츠서 마련해줬다. 조카뻘의 두 소녀는 싱그러웠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나 몸매나 말씨에서 보이는 교양, 외모에 귀티가 어려 있었다. 아마 틀림없이 발뒤꿈치도 매끈매끈하고 피부도 좋을 것이다. 그녀들이 풀어놓는 대화는 신선했다. 딱 그만큼 알고 있으려니 하는 만큼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보다 섹스 얘기에 약간 주저했다. 독자들은 여대생의 직설에도 풋풋함과 귀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들을 보는 내 느낌은 조금 달랐다. 내 눈에 그녀들은 적절히 누리고 사랑받아 온 알파걸로 보였었다.
서울이었으나 논과 밭이 있던 변두리 마을, 대식구가 한 방에서 자야했던 가정환경, 똘똘하다 소리 듣고 자랐지만 별 수 없이 지방대학을 갔던 성적·지적·경제적 통계치와 관계없이 나는 콤플렉스 가득한 소녀였다. 자매가 많아서 갖고 싶은 것은 한참 기다려야 가질 수 있거나 꿈도 꾸기 힘들었다. 늘 나중에 주어졌고 그것에 매우 감사해야했다. 가지려면 어른 말대로 고분고분해야 했다. 버리는 것은 내가 버려지는 것만큼이나 큰일 날 일이었다. 딸들이 많았기에 엄격했고 반항은 금지되어 있었다. 늘 주위에서 '저 집은 아들이 없어 뭔가 부족한 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한국 여자들은 간혹 연애에 있어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 조선시대 교육을 받아 남자에게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믿고, 버릇없는 남자도 고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참는다. 의외로 이런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e메일로 가끔 오는 고민 상담이나 지인을 통해 들은 얘기들로서는 심각한 일도 많았다. 여자를 개 패듯 패는 남자를, 여자가 원해서 곁에 둔다고도 했다. 오빠는 잘못이 없으니 얘기를 잘하면 된다고 했고, 다른 여자를 만나도 그건 잠깐 호기심에서지 나에게 다시 돌아 올 거라고 했다.
기막히게도 실컷 나쁜 짓하다 와서 배설하듯이 자기 여자한테 해대는 행위를 ‘사랑의 섹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아선호사상이 태교 적부터 뿌리박힌 한국 여자들은 유독 자아존중감이 낮다고 한다. 사실 나라고 그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 역시 그랬었으니까. 나도 참. 친구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을 곁에 두려했던 나쁜 남자를 왜 용서했을까. 좋다고 매달려서 달라길래 다 주고나면 지겨워하는 남자에게 왜 매달렸을까. 바보남자를 믿고 타이르고 가르치면서 평강공주놀이를 했을까. 침대에서 화려한 매너를 자랑하면 손가락질 당할지도 모른다고 참고 왜 연기를 했을까. 그렇게 착한여자 콤플렉스가 결국 자신도 망치고 만다는 걸 몰랐다. 학교 때 인기도 많았고 뭣도 빠지지 않던 내가 베타걸일 리가 없었거니와 알파걸이니 골드미스니 하는 것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냥 만들어낸 거다. 알파건 베타건 소녀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름답고 예쁜 법이다. 그녀들을 보고 내 그맘때를 가만히 떠올렸다. 순수했고 많이 뜨거웠던 나 역시 사랑스러웠던 시절이었다. 그녀들 옆에서 발끈거리며 앉은 그 시절의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내밀었다.
이영미는?
만화 '아색기가' 스토리 작가이자 '란제리스타일북' 저자, 성교육 강사, 성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