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채쟁챙챙.”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와서 꽂혔다. 검객들의 괴성같은 기합소리도 터져나왔다. 지난달 29일 오후 이천장애인종합체육훈련원 휠체어펜싱 훈련장에선 8명의 국가대표 선수가 땀흘리고 있었다. 2011 세계휠체어펜싱선수권대회와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8일부터 이탈리아 카타니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엔 2012년 런던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의 출전권이 달려있다. 우리나라에선 김선미(23)· 윤월재(44)· 박인수(40)가 올림픽 도전장을 내밀었다. 3인 3색의 도전기를 소개한다.
◇김선미, 유망주의 도전 처음 나간 국제대회에서 사고를 쳤다. 김선미는 지난해 광저우아시안게임 휠체어 펜싱 여자 에페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 랭킹 2, 3위 선수들을 단번에 제쳤다. 앞서 열린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며 우리나라 휠체어 펜싱 여자 에페를 평정했다. 88년생, 22살의 나이었다. 휠체어 펜싱계는 유망주의 등장에 환호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실적은 없었다. 월드컵 등 국제대회를 계속 나가야 경험도 쌓고, 올림픽 출전에 필요한 포인트도 쌓을 수 있다. 그러나 김선미는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프랑스나 폴란드 등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하려면 한 번에 300만~400만원 씩 들었다. 자비로 해결하기엔 너무 큰 비용이었다.
김선미의 어머니는 8월 말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 아프신 어머니. 김선미는 검을 내려놓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영화관에서 팝콘을 파는 일부터 PC방 아르바이트까지, 불편한 다리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훈련을 해야 할 시간에 돈을 벌러 다니니 실력이 늘 턱이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김태완 휠체어펜싱 국가대표 코치가 나섰다. 자비를 털고 여 저기 조금씩 후원을 받아 대회를 내보냈다. 동료 선수들도 힘을 보탰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잃고 싶지 않은 아까운 선수”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선미는 세계선수권 무대를 밟았다. 코칭스태프나 동료는 “우리나라 휠체어펜싱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다.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 윤월재, 마흔의 투혼윤월재는 마흔이 다 돼서야 휠체어펜싱에 발을 들였다. 친구를 따라간 펜싱 훈련장에서 한 번 검을 잡아본 뒤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사무일을 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어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던 차였다. 세 아이의 부양은 학습지 교사를 하는 부인에게 잠시 맡겼다. 윤월재는 결국 펜을 놓고 검을 들었다. 부인에 대한 마음의 빚은 그를 더욱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휠체어 펜싱을 시작한 뒤 1년 남짓 만에 국가대표 타이틀을 달았다. 아이들은 ‘국가대표’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윤월재는 “가족을 위해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다.
◇ 박인수, 그를 바꾼 펜싱유쾌한 사람이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기자에게 먼저 농담을 걸기도 했다. 밝은 성격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박인수를 고개를 내저었다. “스물아홉에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술 마시고 아내에게 화내고 오랫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뜻 밖의 얘기였다. 휠체어 펜싱을 시작하고 그가 달라졌다. “4년 전 검을 잡았는데 그 때부터 생활의 활력소가 생겼다. 무엇보다 목표가 있다는 게 좋았다.” 부인과의 사이도 좋아졌다. 지난해 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 사브르에서 동메달을 딴 그는 다음 목표를 올림픽 출전으로 잡았다.
세 선수들의 바람은 같았다. 조금 더 편안한 환경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박인수는 "국제대회 실적에 따라 지원금이 결정되는데 지금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며 아쉬워했다.
손애성 기자 [iveri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