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에서 문호(신성일)가 삐에로 흉내를 내며 호스티스 경아(안인숙)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최인호 원작 '별들의 고향'은 호스티스 경아의 비극을 그렸다.
암울한 시대. 영화 '별들의 고향'의 탄생은 시대의 필연이었다.
1973년 말 강원도 인제에서 이만희 감독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 촬영을 마쳤다. 그 해 여름 독일 베를린영화제 참가를 계기로 유럽 여행을 한 직후 '들국화는 피었는데' 촬영으로 인제에서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서 나와 이 감독은 후속작으로 황석영 원작의 '삼포 가는 길'을 함께 하자고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오니 집에서 신상옥 감독의 '13세 소년'과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 등의 출연을 확정지어 놓은 상태였다. 스케줄 상으로 '13세 소년'과 '별들의 고향' 촬영이 동시에 잡혀있었다. 74년 내 출연작은 두 작품을 포함해 19편이었다.
40여 일 동안 강원도 평창에서 '삼포로 가는 길' 촬영을 할 스케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충무로를 비웠기 때문이다.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운 이 감독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삼포 가는 길'은 이 감독의 유작이 됐다. 지금도 그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영화계는 3선개헌·유신헌법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점과 맞물려 내리막길을 걸었다. 사회 현실을 반영한 영화는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문예영화 대신 새마을운동·전쟁·반공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제작됐다. 영화계가 쓰러지는 모습이 내 눈에 훤히 보였다.
어두운 터널같은 시대 속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갈망은 더욱 커졌다. 양희은·송창식·이장희 등이 간편한 차림에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치며 세시봉 열풍을 일으켰다. 72년 1월 고우영은 만화 '임꺽정'을 일간스포츠에, 73년 9월 최인호는 호스티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별들의 고향'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젊은이들은 일명 '청바지문화' '청년문화'를 통해 해방감을 맛보았다.
영화계에선 '별들의 고향'의 영화 판권 잡기 전쟁이 벌어졌다. 최종 승자는 최인호의 서울고 동창인 이장호였다. 신상옥 감독의 막내 조감독쯤 되는 서열로 신필름에서 소품 들고 촬영장을 왔다갔다 하는 일을 한 그는 "나 한 번 도와다오. 내가 감독할 수 있게 해줘"라고 친구에게 사정했다. 이장호는 작품을 들고 신 감독을 찾아가 감독을 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신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품은 놓아두고, 넌 가거라."
낙심한 이장호는 작품을 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다가 화천공사로부터 투자를 받게 됐다. 그는 원래 이희우에게 원작을 각색시킨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나리오는 원작과 상당히 달랐다. 불만을 가진 최인호가 원작을 요약한 시나리오를 이장호에게 주었다. 그는 두 개의 시나리오를 들고 고민하다가 소설책을 촬영장에 들고 와 찍기 시작했다. '13세 소년'까지 동시에 촬영하던 나로선 답답하게만 보였다.
"야, 그만해. 책 들고 찍으면 5시간 짜리 영화 만들겠다."
난 이장호에게 손을 흔들고 현장을 떠났다. 그는 소설책을 치우고 다른 시나리오를 내게 내밀었지만 실제로는 소설책 촬영을 고수했다고 한다. 내가 속은 셈이다. 이장호는 2시간 반짜리를 찍은 후 한 시간을 줄여 상영했다. 당시 필름 3만자(2만자 미만 사용이 일반적)를 넘게 사용해 화제가 됐다.
74년 벽두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4월 국도극장에 걸어야 해 굉장히 쫓기는 일정이었다. 초보 감독의 '의욕'으로 좌중우돌했지만 분위기만큼은 정말 좋았다. 촬영장인 뚝섬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