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삶이 어렵더라도 최소한, 감방보다는 낫다. 허리가 편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만도 큰 행복이다.
2005년 2월 24일 밤 11시 40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구속적부심이 떨어지자 교도관이 내게 수갑을 채웠다. 사진기자 7~8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수갑 찬 것 찍으려고 하지? 이거 찍어봐."
나는 수갑 찬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혼비백산한 사진기자들은 카메라 플래시를 파바박 터트리고 달아났다. 25일 이른 새벽에 황금동의 대구구치소로 이동했다. 대구구치소에 도착하자마자 소지품과 양복을 영치시키고, 청색 구치소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구치소는 미결수 또는 재판 받는 사람들이 길어야 2개월 남짓 머무르는 곳이다. 나는 독방을 요구했다. 병렬 복도를 한참 걸어들어가면서 오른쪽의 감방들에서 모두 기웃거리는 걸 느꼈다. 복도에 책꽂이가 있었다. '화'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빼어 들고 맨끝 골방에 이르렀다. 교도관이 말했다.
"이 방이 얼마 전까지 문희갑 시장이 있던 곳입니다."
엄청나게 추웠다. 구속 첫 날 잠을 자지 못했다. 감방에는 24시간 형광등이 밝게 켜져있다. 교도관이 감시하고, 수인이 자해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다. 스위치도 없고, 형광등이 천장 높이 달려있다.
물품 구매도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지급 받은 물품 이외의 신발·내의·담요 등은 가족이 매점에서 사서 넣어준다. 담요는 100%에 가까운 화학섬유 제품이어서 엄청난 먼지 덩어리다. 온 감옥소를 항상 뿌옇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래서 교도관들은 복도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같은 기간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대철 의원이 내게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란 책을 내게 보내왔다. '오체투지'도 그 곳에서 인상깊게 읽은 책이다.
'닭장 버스'라고 불리는 호송차를 타고 검사에게 불려갈 때도 수치스러웠다. 호송차 창문은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촘촘한 격자철장으로 덮여 있다. 밖을 구경하기 힘들다. 호송차로 20~30명이 함께 이동한다. 그들이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2개 찬 내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가 굴욕이다. 빨리 그 곳을 벗어나 교소도에 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대구하계U대회 후원금을 받은 문제를 두고 검사는 대가성 수의계약이라고 결론내렸다. 구형 8년에 실형 5년이 떨어졌다. 대구구치소 생활 두 달 만에 대구 달성군 화원교도소로 옮겨졌다. 그 곳엔 독방이 없다고 했다. 교도소 측의 배려로 감방 속의 감방이라 할 수 있는 '징벌방'에 들어갔다. 화원교도소는 눈만 뜨면 스피커를 통해 헤비메탈 같은 뽕짝이 귀가 찢어지게 울려퍼진다. 난 완전히 미칠 것만 같았다. 정상이던 혈압이 그 곳에서 185-87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병사로 옮겨갔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고혈압 약을 먹고 있다.
2006년 봄 의정부교도소 독방(1.31평)에 들어갔다. 책 많은 나를 배려한 교도소장이 목수 출신 수감자들을 동원해 벽에 3단 책꽂이를 달아주었다. 황석영의 '장길산', 이문열의 '삼국지' 등 전집과 중국 고전들을 미친 듯이 독파했다. 불자인 나는 매일 아침 108배·'반야심경' 260자 쓰기·냉수 마찰로 건강을 지켰고, 원예반에 속해 국화를 길렀다. 밖에서 내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대부분이 서명해주었고, 동부이촌동 주민 및 전국·해외동포 팬도 힘을 모았다. 특히 엄앵란의 노고가 대단했다. 구속 2년 만인 2007년 2월 21일 특별사면을 받고 출감했다. 내가 교도소 정문을 나서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한 마디 해달라고 했다.
"공짜밥 잘 먹었소. 법무부 장관 고맙소."
오늘로 연재를 마친다. 지난 7개월 동안 내 얘기를 들어주신 일간스포츠 독자들에 감사 드린다. 내가 잘한 일은 잘한대로, 못한 일은 못한대로 숨김 없이 전하려고 노력했다. 구술을 하면서 내 몸의 알맹이를 다 쏟으낸 느낌이다. 지금 행복한 피로감 속에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다.
(영화배우 신성일의 자전적 스토리 '청춘은 맨발이다'는 137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지난 7개월 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