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나의 롤모델 故 최동원…뛰어넘고 싶었다”



-최동원과 맞대결이 성사됐을 때 상황은.

“1986년 4월19일이었다. 김응용 감독님(당시 해태)이 나에게 '내일 최동원 선발인데 너 던질래?'라고 물었다. 나는 져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던지겠다고 했다. 거기서 내가 거절했으면 맞대결이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1-0으로 이겼다. 동원이 형이 홈런을 하나 맞았다. 사실 최동원 선배 부담이 더 컸을 거다. 나는 후배고, 이제 막 크고 있는 단계였다. 선배의 부담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경기(8월 10일)엔 내게도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0-2로 졌다.

첫 번째, 두 번째 던졌을 때 마음 자세가 달랐다. 전체적으로 치면 선배가 훨씬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세 번째 무승부 경기는 내가 운이 좋았다. 1-2로 지고 있었는데 9회초 동점이 됐다.

포수 타석에 대타를 써서 연장 10~15회에는 우리 팀 포수가 없었다. 백인호(KIA 코치)가 마스크를 썼는데 '변화구 던지면 저 못 잡으니까 직구만 던져라'고 했다. 연장전에서는 직구 로케이션만 가지고 버텼다.”

-경기 끝나고 둘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선 “15회까지 던지고도 서로 지기 싫었다. 누가 더 강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최동원 선배와 얼음찜질을 하면서 ‘우리, 승부 끝날 때까지 더 던져볼까’ 이야기도 했다.”

-그날 이후 컨디션은 어땠나.

선 “힘들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최동원 선배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렸다. 나의 연투능력은 최동원 선배에게 비교가 안 된다.”

-수많은 라이벌이 있었고 승리가 있었다. 최동원이 생애 최고의 라이벌이었나.

“82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최동원 선배를 비롯해 김시진·임호균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계셨다. 내가 던질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본과의 결승전 선발 기회가 주어졌다.

어떻게 던졌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다. 구름 위에서 공을 던진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가장 이기고 싶은 상대는 최동원 선배였다. 일본전보다 최동원 선배와의 경기에서 더 이기고 싶었다.

솔직히 긴장감은 국가대표 때가 컸다. 하지만 승부욕은 최동원 선배와의 대결 때가 더 강했다. 정말 이기고 싶었다. 아니, 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이기고 싶었을까.

“롤모델이었으니까. 극복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내 우상을 뛰어넘어야 겠다는 열정이 있었다.”

-86년만 해도 최동원의 구위는 다소 떨어진 것 아니었나. 당시에는 성적도 선동열이 조금 앞섰는데. 그런데도 스스로를 도전자라고 생각했나.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정규시즌 27승,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하셨던 84년이 최동원 선배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도 20승을, 86년에도 19승을 하셨다. 생각해 봐라. 지금 17~18승이면 최고의 기록이다. 구위도 최고였다."

-최동원과의 맞대결을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승부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15회 연장 경기는 거의 없다. 지금 두산 감독이 된 김진욱과도 15회 연장 맞대결을 벌여 1-1로 비긴 적이 있다. 그래도 내 우상이었던 최동원 선배와 던졌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30년 야구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아닌가 싶다.”

-1승1무1패다. 또 붙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는지.

“최동원 선배가 그날 맞대결 후에는 하락세였다. 솔직히 선배나 나나 서로 될 수 있으면 피하자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최동원과 맞대결을 펼쳤던 그 날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내가 한층 ‘성숙해진’ 날이다.”

김식 ·유선의 기자 seek@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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