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의 본명은 김혜자로 미국의 패티 페이지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예명을 지었다. 1958년 미국 제8군 무대에서 고 박춘석 작곡가의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를 불러 유명세를 탔다. 이어 1960년대 패티김 시대는 활짝 열린다. 1962년 박씨의 곡 '초우'로 가요계에 해성같이 등장해 매혹적인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행동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66년 동양방송 '패티김쇼'에 출연해 이 프로그램의 색소폰 주자인 작곡가 길옥윤을 만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해 말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마리아'(1969) '사랑이란 두 글자'(1971) '서울의 찬가'(1969) 등을 히트시켰다. 하지만 1972년 길옥윤의 음주벽 때문에 이혼해 큰 화제를 모았다.
패티김은 최초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가수였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했고, 1971년에는 디너쇼를 시도했다. 이후 일본과 동남아시아, 미국에 진출했고 미국 NBC '자니 카슨-투나잇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대중 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서울의 연가'를 성공적으로 공연했다.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조용필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했다. 1996년에는 연예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문화훈장(5등급)을 수여받았다. 2004년에는 제 19회 골든디스크에서 공로상을 받으면서 "노래 잘하는 가수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소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