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프로농구 서울 삼성과 서울 SK의 경기가 열린 잠실실내체육관. 기자석 뒤쪽에 앉은 네 개의 눈이 코트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창원 LG의 전력분석을 맡고 있는 박도경(37) 코치와 정재훈(39) 코치였다. 박도경 코치는 올해로 벌써 8년째 전력분석을 맡아온 프로농구 1세대 전력분석원이다. 박 코치에게 전력분석원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업 선수에서 전력분석원, 그리고 코치까지
박도경 코치는 현역 시절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다. 1998년 중앙대를 졸업하고 SK에 입단한 그는 2m2㎝의 큰 키를 앞세워 주로 백업센터로 뛰었다. 2년 뒤 LG로 이적했으나 2001-2002 시즌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4년간 69경기에 출전해 81점·112리바운드를 올린 것이 그의 통산 기록.
은퇴 뒤 매니저로 일하던 그에게 2004년 새로운 보직이 떨어졌다. 바로 전력분석이었다. 한상욱 LG 사무국장은 "전력 분석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때였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필요한 일인데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설명했다.
LG는 야구단에서 전력분석으로 큰 재미를 본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과 함께 전력분석시스템을 도입한 LG는 이후 일본 주니치로부터 '아소보'란 프로그램을 구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력분석 시스템을 가동했다.
농구단 역시 디지털 전력분석시스템의 도입을 고안했고, 처음으로 이 업무를 맡게 된 사람이 박도경 코치였다. 박 코치는 "막막했다. 컴퓨터도 그렇고, 영어도 그렇고 거의 백지 상태였으니까… 학원에 다니면서 처음부터 공부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물론 지금은 노하우가 생겨 1~2시간이면 척척 상대 패턴들을 정리해 보기좋게 종이 몇 장에 정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1년 정도 시행착오를 겪자 점차 틀이 잡혔다. 박 코치는 경기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상대팀의 경기를 직접 촬영하고 분석해 자료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프로그램이 없어 한 번 자료를 만드는데 4~5시간이 걸리기 일쑤였다.
밤새도록 작업한 자료를 갖고 급히 비행기를 탄 뒤 창원으로 향해 코칭스태프에게 전달한 적도 수 차례였다. 박 코치는 "과거 8㎜ 비디오 테이프를 쓸 때는 정말 일이 많았다. 나중에 창고에 쌓인 비디오 테이프를 버렸는데 박스로 20개가 나왔다"고 웃었다.
박도경 코치는 "최근에는 모든 경기가 중계되고 2002년 히딩크 감독이 사용했던 '스포츠코드 게임브레이커'란 프로그램이 있어 일이 편해졌지만 예전에는 정말 힘들었다. 매일 밤늦게 일하다 보니 시력이 1.5에서 0.4까지 나빠졌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의 가격은 대력 3000만원대로 지금은 프로농구 구단들 절반 이상이 사용하고 있다.
LG는 전력분석원에 대한 효과를 인정해 올시즌부터 정재훈 코치까지 전력분석원을 두 명으로 늘림과 동시에 '코치'란 직함까지 줬다. 박 코치는 "나름대로 우리 일에 대해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하다"고 했다.
1인3역 해내는 만능맨
전력분석원의 기본적인 업무는 다음 경기에서 맞붙을 상대팀 분석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팀 경기를 못 보는 일이 허다하다. 박 코치는 "올해는 창원 홈 경기를 1경기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1일에도 삼성의 경기를 보느라 정작 그 날 열린 LG 경기는 나중에 화면으로 접해야 했다.
박 코치는 시즌 개막 후 2~3라운드까지가 제일 바쁘다. 각 팀들의 새로운 패턴 공격들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NBA에서는 보통 5~6명의 전력분석원이 팀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전력분석원의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카우트 업무도 겸하기 때문이다. 프로 경기가 없는 날에는 대학 경기가 열리는 곳을 찾아 선수들의 모습을 촬영한다. 방이동 LG 체육관에 있는 전력분석실 한 쪽에는 지난해 드래프트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의 영상이 담긴 DVD가 빼곡했다.
농구 관계자들에게 선수들에 대한 평가와 정보를 얻는 것 역시 이들의 몫. 박 코치는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선수의 기량 외적인 것들도 정리해서 감독님에게 전달한다"고 덧붙였다.
박 코치는 여기에 또 하나의 업무를 더 맡고 있다. 외국인선수 영입 보조 업무다. 외국리그들의 플레이와 기록을 볼 수 있는 웹프로그램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를 모으고 직접 경기화면을 보면서 평가를 돕는 일을 한다.
미국프로농구(NBA)는 물론 전세계 농구리그 관계자들이 모이는 D리그의 쇼케이스에도 통역 등 외국인 선수를 담당하는 이들과 동행한다. 때때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와줄 때도 있다. 박 코치는 "요즘은 선수들이 직접 자료를 달라고 할 때도 많다. 프로다운 마인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손은 가지만 기분은 좋다"고 말했다.
어떻게 전력분석원이 될까
아직까지 전력분석원의 세계는 개방적인 편이 아니다. 선수 출신이 아니면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다. 박 코치도 "아무래도 선수 출신 외에는 들어오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농구계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면 적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력분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많다. 지난해 체육인재육성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체육대학교가 주관사업자로 나서 진행한 '스포츠 애널리스트' 과정에는 무려 72명의 교육생이 몰려들었다.
박도경 코치는 핸드볼 여자국가대표 출신으로 현재 대표팀 전력분석을 맡고 있는 홍정호, 프로야구 SK에서 전력분석을 맡았던 김정준 XTM 해설위원 등과 함께 강사로 서기도 했다. 박 코치는 "박재현 교수님의 도움으로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생각보다 전력분석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아 놀랐다"고 전했다.
박 코치는 "가장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팀 성적이 잘 나오면 뿌듯한 기분이 든다"며 "이 분야에 뛰어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라고 덧붙였다.
팁=NBA에서는 전력분석원을 '비디오 코디네이터'라고 부른다. 전력분석원을 거쳐 지도자의 길을 걷는 경우도 있다. LA 레이커스의 마이크 브라운 감독이 대표적이다. 브라운 감독은 대학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나 NBA에서는 뛰지 못했다. 그는 덴버 너기츠에서 5년간 전력분석 및 스카우트로 활동하다 워싱턴, 샌안토니오 등에서 코치로 일했다. 2005-06시즌에는 클리블랜드 지휘봉을 잡았으며 2009년에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SK가 전력분석원을 지도자 수업의 일환으로 삼고 있다. 문경은 감독 대행과 전희철, 허남영 코치가 모두 전력분석원을 경험했다. 이재호 SK 홍보팀장은 "전력분석원을 경험하면서 전술적으로 지도자에게 필요한 소양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