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남자의 자격'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은 적이 있다. 뮤지컬 음악감독인 박칼린씨를 내세워 합창단을 꾸렸을 때 나는 '남자의 자격'의 ‘본방’을 사수하는 열혈 시청자가 되었다. '남자의 자격'은 이경규·김국진·김태원·양준혁·이윤석·전현무·윤형빈 등 일곱 남자들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소재로 삼은 오락 프로그램이다. 이경규가 40대를 막 넘어선 50대이고, 김국진·김태원·양준혁·이윤석은 40대고, 전현무와 윤형빈은 40대를 바라보는 30대 중반이다.
그러니까 ‘남자의 자격’ 구성원들의 중심축은 40대 남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청순함과 미숙·열정이 어지럽게 뒤섞인 스무 살 무렵의 청춘들이 아니다. 40대란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단 청춘의 제일선에서 물러나는 나이다. 늙었다고도 젊었다고도 할 수 없는 40대는 인생의 반고비에 이르는 연령대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삶의 토대가 한층 견고해지면서 문득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도 이 무렵이다.
'남자의 자격'은 그런 40대에 포커스를 맞추고, 청춘의 불안과 질풍노도를 잠재우고 현실에 안착하면서 살 만해진 중년에 접어드는 남자들이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에 대한 도전 이야기를 펼쳐낸다. 박칼린 씨가 이끈 합창대가 ‘넬라 판타지아’라는 노래로 깊은 감동을 끌어내며 막을 내린 뒤 김태원 씨가 지휘자로 나선 ‘실버합창단’이 이어졌는데, 이때 사람들에게 버킷 리스트란 인생의 어느 시기에 덧없이 놓친 꿈 찾기이자, 생의 책임과 의무에 복무하느라 방치한 자아 찾기라는 게 또렷하게 드러났다.
백발이 성성한 사람들이 '남자의 자격' 오디션에 응모하며 왜 자신들의 인생에서 노래하는 것이 버킷 리스트가 되었는지를 진솔하게 고백할 때, 인생의 만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노래를 하게 된 이들의 얼굴은 행복과 설렘으로 빛이 났다. 그들은 더도 덜도 아닌, “행복해지기 위해 분발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지평을 연다. 선수를 쳐서 행복을 앞질러 나아갈 때, 바로 그때 행복이 우리에게 온다”(베르트랑 베르줄리)는 것을 가르쳐준다.
‘버킷 리스트’는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나온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2007)로 널리 알려졌다.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는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는데, 어느 날, 대학 신입생 시절 철학교수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커터 체임버스는 46년의 세월이 지나 자동차 정비사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는 버킷 리스트가 자신이 잃어버린 행복에의 꿈이라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그의 인생은 그 잃어버린 꿈들이 만든 구멍들로 공허해졌다는 확신에 이른다. 우연히 한 병실을 쓰게 된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버킷 리스트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돈을 벌고 사업체를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꿈과 다른 현실을 사는 두 사람이 한 병실을 쓰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고, 그리고 삶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한다. 두 사람은 병실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간다.
두 사람의 길을 이끄는 것은 바로 두 사람만의 버킷 리스트다. 두 사람이 어딜 가고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렝게티 초원에서 지프를 타고 피라미드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그 여정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닫느냐는 것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세운 타지마할에서 그들은 저마다 겪은 사랑과 경험들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데, 이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내면에 비쳐드는 한 줄기 진정한 변화의 빛이야말로 버킷 리스트가 주는 진정한 가치다.
당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정말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적어라! 그게 바로 당신의 버킷 리스트가 될 것이다. 청나라의 문장가 장조는 “손에 쥔 부채만 보아도 그 사람의 우아하고 속됨을 알 수가 있고, 그 사람의 교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고 썼다. 이때 부채는 버킷 리스트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당신의 버킷 리스트는 당신이 처한 현실과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주는 목록이다.
당신이 직장인이라면, 당신의 버킷 리스트에는 외국어 공부하기, 가족을 위해 시간 갖기, 운동하기, 좋은 인맥 만들기, 나만의 시간을 갖기, 여행 떠나기, 미친 듯이 일하기, 연애나 결혼하기, 체중을 줄이기, 매일 아침 신문 읽기, 1년에 책 100권 이상 읽기, 술과 담배 끊기… 등등이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버킷 리스트를 100가지 쯤은 적을 수 있다. 내게 버킷 리스트는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은 것이다.
내가 나만의 버킷 리스트로 그림 그리기,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방을 갖기, 마라톤 완주 해보기, 피아노 연주법 배우기, 태극권 수련하기, 공중부양에 도전하기, 가끔씩 단식하기, 프로방스(프랑스 남부)에서 1년을 살아보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이 있는 그리스 크레타 섬 방문하기,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보기, 아미쉬 마을에서 살아보기, 자전거를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하기, 공동체 마을을 꾸리며 살기, 평생 일 안하고 놀기, 날마다 국립도서관에 나가 미친 듯이 책 읽기, 마침내 국립도서관에 꽂힌 책을 다 읽기, 집에 대나무를 심고 대숲에 스치는 바람소리 듣는 것을 낙으로 삼기, 모란꽃과 작약꽃을 심고 작은 연못을 파서 수련을 심기, 정원 가꾸기, 사춘기 때 잠깐 스쳤던 나만의 베아트리체를 찾아 나서기, 세상의 계곡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의 아름다움에 등급을 매기기, 온실에서 각종 새들을 키워보기… 등등을 적어내려 갈 때 그 하나하나는 어떤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흰 눈밭 같이 순결하다.
인생에는 오로지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내가 걸어온 길과 내가 가지 않은 길. 내가 선택하고 걸어온 길은 지금 나의 현실과 운명을 이루고,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이루지 못한 꿈과 동경(憧憬), 부재하는 현실이다. 한참 그림에 몰두해 있던 고등학교 입학을 할 무렵 나는 예술고 진학을 원했지만 집안 어른들은 실업계 진학을 권유했다. 그 당시 가세가 기운 집안의 장남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실업계 고교를 나와 은행과 같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림을 배우려는 꿈은 차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란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는 현장이니까, 항상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성의 압박감을 준다. 꿈은 현실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뒤의 문제다.
버킷 리스트는 그 본질에서 비현실적이고 비효용적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선택에서 밀려나고, 차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현실적인 생존 문제들을 해결하는 측면에서 비효용적이고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는 살아남기 위해 뒷전으로 밀어놓은 일들, 꿈과 동경으로 남게 된 목록, 즉 가지 않은 길이다. 버킷 리스트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하고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아름답다. 어쩌면 버킷 리스트는 없어도 그만인, 먹고 사는 일과 무관한 생의 잉여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의 합목적성에 함몰돼 낮밤 가리지 않고 달려온 이 삶의 팍팍함을,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그 이루지 못한 꿈들이 만든 설렘과 기대들로 꿋꿋하게 견뎌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버킷 리스트를 적어보라! 그것은 현실에서 유예했던 꿈과 행복을 찾으려는 첫 번째 시도가 될 것이다. 버킷 리스트가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행복으로 바꾸는 마법을 가진 리스트로 만들어보라!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죽기 전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 자살이나 사형 시 목에 밧줄을 감고 양동이(Bucket)를 차버리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장석주는 2000년 서울을 떠나 경기도 안성에 ‘수졸재’를 짓고 글쓰기와 독서에 몰두한다. 문학가로는 보기 드문 부지런함으로 시인·소설가·문학비평가 등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노자·장자·주역 등에 빠져 지내며 최근 15번째 시집 ‘오랫동안’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