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직장이라 모든 것이 낯설었던 첫 몇 주가 지나고 방송국 로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누가 찾아와서 기다린다고. 입구에서 제지당한 이유가 사회인이 아닌 군인이어서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꺽대 총각 머리 위에 노란 작대기 두 개가 보였다. '곤아!'
졸업작품을 찍느라 발길닿는 대로 전국을 누비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차를 몰다가 갈대밭을 들어가기도 하고 석양의 바다를 담은 렌즈에는 물빛은 간데없고 황금바다라고 자지러지던 꿈만 가득했던 20대였다. 불안한 미래를 가진 젊은이들은 사랑이 유일한 도피처다. 여자는 로비에 서있는 그 일등병을 기억해내고는 뒤통수가 먹먹해졌다. 반가움이었고 미안함이었고 당황스러움이었다.
'절대로 자지 않았어.' 순수했던 시절의 가장 지독한 일탈이 고작 민박집에서 담배를 피우고 소주를 마시며 처음으로 자유다 여겼던 '대딩'졸업생들. 뒤에서 따뜻한 손길이 느껴져서 여자가 선잠을 깼다. 이리저리 뒤섞여 잠이 들었으니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다. 아랫배까지 손을 뻗쳐서 닿을락 말락 여자를 긴장시켰는데, '누나 사랑해'.
곤이가 뭐라 말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여자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날 밤에 곤이의 손이 흠뻑 젖을 정도로 여자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섹스가 아니었다. 아랫배에서 맴돌던 손을 잡아 끌었던 건 여자였지만 그건 치기였고 취기였다.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소년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던 거다. 곤이는 그것이 생애 첫 경험이었고 5년도 넘게 간직해오던 소중한 기억이라고 했다. '곤아, 미안했어. 너에겐 미안해.' 하지만 그건 미안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여자는 곤이를 달랬다.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고 곤이도 어색한 웃음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첫 경험의 파트너들은 평생 각인된다. 대부분 우리들은 누가 나의 첫 상대일까에 연연하지 내가 누군가의 첫 상대인지 에는 무심해왔던 게 아닐까? 귀찮고 마음에 걸리는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이라는 걸 공감한다. '그도 그랬겠지. 그 남자도 그랬겠구나.'
그 남자가 여자를 기다려왔다는 달콤한 말에 주저없이 순정을 내어주었다. 꼭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난 처음이야'라고 그가 이성을 잃고 안겨왔을 때 분명히 말했다. 남자가 그걸 기억했을지, 적어도 들었는지 조차 여자는 알 수 없었다. 그건 혼자만의 초라한 의식이었고, 지금 여자는 실루엣조차 기억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있을 테니까. 그 남자가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인의 가장 깊숙한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와서 여자는 마음 속에 두 자리를 내어 놓는다. 그녀의 첫 경험은 한 남자가 아닌 두 남자였음을 인정하고 곤이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너의 순정을 마음대로 빼앗은 죄, 정말 미안하고 네 마음 속에 평생 남아있을 여자가 되어 정말 고맙다고….
최수진은?
불문학 전공, 전직 방송작가, '야한 요리 맛있는 수다' 의 저자. 성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