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밴드 버스커버스커의 ‘꽃 한송이’에는 주인공이 첫사랑과 거닐던 명소인 듯한 ‘단대 호수’가 등장한다. 듣자니 섹시함과는 한참 멀 것 같은 순진한 노래인데다 리더 장범준은 어딘지 어수룩한 감자코 훈남이지만, 역동적이고도 정확한 브래드의 드럼에, 서정적인 선율이 한없이 섹시하게 와 닿는 묘한 노래다. 흐드러지는 벚꽃 향이 알싸하게 코를 찌르는 환상 때문일까.
그러니까 그 날에도 벚꽃비가 내렸다. 그와 서로 고백을 주고받은지 얼마 안되어 몰래 동아리 모임을 빠져나와 약속한데서 만나 걸었던 그 밤이었다. 그는 장난삼아 밤꽃냄새 나지 않냐고 물었고, 나는 벚꽃이 만발했는데 웬 밤꽃이냐면서 순진한 척을 했다. 기숙사 옆 길로 들어가는 산 속 산책로는 너무 후미진 곳이어서 싫었다. 그 길 안쪽에 있는 공터는 몇 년 전 내가 다른 남자와 사귈 때 갔던 곳이기도 했다. 벚나무 옆 길로 접어들어서 운동장 안쪽에 적당한 벤치가 있었다.
나무가 묘하게 서 있어서 어느 각도에서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그런 장소였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벚꽃이 양떼구름보다 더 많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덮은 것은 구름이 아니라 사실 그의 입술이었다. 벚꽃 향기만 났다는 건 100% 오바고, 입술 끝에서 약간의 땀 냄새와 담배 냄새, 커피 냄새가 함께 났다. 그리고 벤치 뒤쪽에 난 공간은 움푹 파여 있었다. 그가 덮쳐 누르자 그와 나는 포개져 침낭을 함께 입고 꿰맨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가 단추도 풀지 않고 내 남방 자락을 올렸지만 막지 않았다.
그가 내 양 손을 꽉 쥐어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된(척을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그와 나의 비밀이 생겼다는 것이 더 좋았다. 그 향기, 그 빛깔, 그 목소리, 그리고 벤치 밑으로 웬 신발 하나…. 잠깐 신발?
오 마이 갓. 얼마 뒤 같은 과 친구가 내게 얘기를 했다. 보고 온 사람한테 들었는데, 우리 학교 운동장에 웬 연놈이 왼쪽 끝 벤치 밑에서 애정행각을 하더라고, 아예 벗고서 난리를 치더라고 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2년 전에는 기숙사 옆 길로 접어들어 산 속 후미진데서 하는 걸 봤는데 이젠 학교 교정이 여관인 줄 안다고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남의 애정사에 사생 팬처럼 따라붙는 건 또 뭔 일이고, 그 이상한 인간이 하필 왜 저 인간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그 두 년 다 나다!' 연애를 못해본 친구의 악담치곤 할머니처럼 걸걸했다. 차마 같이 욕을 하지도 못하고 나라고 밝힐 수도 없어서 모른 척을 했지만 속은 끓어 넘쳤다. '그게 바로 너지'하고 싶은 표정을 꾹 눌러 참은 얼굴로 입 비틀고 웃는 그녀의 표정은 어이가 없어 입 돌아가는 줄 알았다. 그건 필시 저도 하고 싶은데 안되니까 별 소리를 다 퍼부어대는 질투심이렸다. 지금 그녀는 미국에 산다고만 들었다. 물론 안 그래도 진작에 소식 끊고 지낼 셈이었다.
‘벚꽃엔딩’, 그리고 ‘꽃 한송이’같은 첫사랑의 노래가 아름답게 들리는 건, 그래도 뒷소문으로 시끄러워진 추억보다는 애틋하고 아련한 추억이 훨씬 더 고왔기 때문 아닐까.
이영미는?
만화 '아색기가' 스토리 작가이자 '란제리스타일북' 저자, 성교육 강사, 성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