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운드 릴레이션십(Rebound relationship)이란 말이 있다. 직역을 하자면 튀어 오르는 관계, 좀 더 적절한 번역을 하자면 만회 관계 혹은 재도약 관계 정도가 될 것 같다. 리바운드 릴레이션십에 대해 제대로 부연 설명을 하자면 긴 연애를 마친 사람이 전 애인을 잊기 위해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과 얼른 사귀고 마는, 그러나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야말로 지난 연애의 아픔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졌다가 새로운 사람을 향해 튀어 올라 새로운 관계에 뛰어드는 모양새다. 그러나 솟아 오른 공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리바운드 릴레이션십이 실패하고 만다.
나도 제법 긴 연애를 마치고 난 뒤라 이별로 입은 상처가 꽤 컸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친절하기만 하면 마음이 쉽게 기울었다. 헤퍼보인다 한들 실연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남자의 체온과 관심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잠시라도 기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던 연하의 남자를 사귀게 되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의 리바운드 가이가 된 연하남은 정말 내게 끔찍이도 자상히 대해 주었다. 처음엔 그런 그가 고맙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는데 왠지 그와 있어도 나의 슬픔이 가시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리바운드 가이와 보내면서 누군가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긴 했다. 비록 이 남자와는 헤어질 것 같지만 그렇게 나는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앞으로 다른 사랑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내 마음이 멀어질수록 리바운드 릴레이션십의 흉한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리바운드 가이, 리바운드 걸이 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위험하고 잔인한 일이다. 당하는 당시에는 모르지만 연애가 끝난 뒤엔 일종의 피해의식이 생기기 쉽다. 자신을 이용해서 옛 애인을 잊고 빛나는 갑옷을 챙겨 입은 뒤 다시 연애의 전장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을 보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다. 그런데 그 짓을, 나를 소중히 대해준 남자에게 하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사귈 수 없을 거 같다며 냉정하게 이별하고 나니 너무 미안했고 안쓰러웠다. 마치 그의 진심을 단번에 뭉게 버린 것처럼 나 자신이 싸구려 창부처럼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벌어졌던 상처가 제 모양을 바꾼 듯 내 마음에서 조금 치유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상처줘서 내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건강하게 들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치유가 되었다고 믿어도 싸하게 마음이 아파왔다. 그러나 그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리바운드 가이의 페이스북을 보니 나에 대한 원망의 글들이 가득했다. 이제 나를 미워하게 되었지만 나는 언젠가 그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그의 부드러운 말들과 살결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나는 용기를 얻었다고. 내 위에서 다정하게 신음하며 우리의 첫 관계를 기념하겠다고 장난스럽게 얘기하던 표정을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정희진은?
야한 여자 이전에 솔직한 여자, 불량미녀를 꿈꾸는 비처녀 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