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내 닉네임을 ‘생각보다 바람직한’에서 ‘생각보다 도발적이지 않은’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데이트메이트로 지내는 친구들에게 “넌 생각보다 도발적이지 않아”라는 말을 꾸준히 듣고 있다. 그 자리에서는 헤헤 웃고 말았지만 다음에도 이런 뉘앙스의 말을 듣는다면 왜 그런지 알려는 줘야할 것 같다.
우선 대체 어떤 생각을 했길래, 내가 생각보다 도발적이지 않다고 느꼈을까? 내게는 그들의 기대감을 채워줘야 할 의무가 없다. 게다가 왜 내가 그들에게 도발적으로 보여야 하는 것일까? 섹스칼럼을 쓴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과감하고 자유롭게 섹스를 제안할 거란 망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데이트라는 게 그날 분위기가 좋고 상대에게 성적 끌림이 있다면야 ‘오늘 집에 안 들어갈래’ 모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는 상대에게 단지 데이트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랑 잘래?”라는 말을 던질 그런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 아니 아니되오.
게다가 그들의 눈에 나랑 뭘 좀 더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망이 어려 있는데 굳이 내가 뭘 더 해야 하는 것일까? 위와 장을 소득하고도 남을 만큼 들어부을 수 있는 술을 사주고, 좀 더 있다가 들어가라고 붙잡고 또 술을 먹이는 의도가 빤히 읽어지는 행동 앞에서 내가 무슨 도발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든 나를 비이성적인 상태로 만들려는 장단에 휘말리지 않고 취하지 않으려고 물을 잔뜩 마시고, 구구셈을 외우는 게 못마땅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날 침대로 유혹하는 방법이 인사불성이 된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이라면 시시할 뿐만 아니라 범죄 아닌가?
내가 어떤 유혹의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런 전략적 행동을 할 만큼 여우같은 머리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못이긴 척 넘어가주지도 않은 건 당연히 ‘너랑은 자고 싶은 콩알만큼의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할 마음은 없기에 웃으며 넘어갔지만 ‘도발적이지 않다’라는 오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가진 분위기 혹은 내가 하는 일과 별개로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암컷으로 수컷을 유혹할 만한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같아 불쾌하다. 뭐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내가 도발하고 싶은 상대는 오직 '애인씨'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애라는 관계가 나의 태도를 규정지을 만큼 결속력있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 순간이라도 안정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만 상대를 도발시키는 스위치가 올라간다. 수동적이거나 순진하게 섹스를 하는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다. 내가 누군가에게 전혀 도발적이지 않다면 그건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관계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현정씨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소녀적인 판타지가 넘치지만 생각 보다는 바람직한 섹스를 즐기는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desirable-h.tistory.com]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