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지속되면서 열을 발산하는 체질인 나는 데이트하기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뙤약볕을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빙수를 두 그릇이나 비워도 ‘덥다 더워’를 연발했다. 그렇다보니 연인과 팔짱을 끼고 걷는 건 곤욕스럽고 손만 잡아도 열기가 느껴져 견디기가 힘들었다.
에어컨디셔너의 인공적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버티는 방법이 있지만, 닫힌 공간에 갇혀 얌전한 데이트가 며칠째 이어지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서로 시간을 비워 만날 수 있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데이트는 ‘해가 진 뒤!’라는 계획을 세웠다. 해가 진 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300m도 걷지 못한 채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여름을 얕본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카페로 들어가 자연과 함께 하는 여름을 보내려면 가까운 계곡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물놀이라도 가자 이런 계획을 세우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리필까지해서 벌컥벌컥 마셔댔다.
저녁 7시가 넘어 해가 질 무렵 만났기 때문에 특별히 뭘 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을 훌쩍 흘러 9시가 넘어가고 있었고 그는 내게 주말의 종결을 의미하는 '개그콘서트' 시청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다. 개그는 아예 손을 놓고 사는 터였지만 그와 TV시청을 해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자고 했다.
DMB를 켜고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보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유쾌하게 잘 웃었다. 웃지 못하는 내가 미안하고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큭큭 거리며 웃었다. TV를 시청하는 동안의 그에겐 나는 완벽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만화책에 몰입하거나 축구 게임에 정신줄을 매어놓았던 남자친구들의 강력 트레이닝 덕분에 그런 걸로 서운해 하는 건 소득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녀 사이에는 유머 코드와 뒷담화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말을 절실 공감하며 나는 '개그콘서트'를 즐겁게 보는 능력과 따라하며 그를 웃겨줄 만한 개인기 같은 걸 갖고 싶어졌다. 물론 일반적으로 연인 사이에 ‘웃기는’ 건 남자가 담당하는 거겠지만 묘한 욕심이 들었다.
나는 유머가 부족하고 농담과 진담 구분도 잘 못하고 특히 유행어를 따라하는 것도 잘 못하는 편이었지만 '개그콘서트'가 끝나고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그가 굿나잇 키스를 하려는 순간 “이건 입이 아니무니다. 아가미이무니다”라며 멘붕스쿨의 갸루상을 따라하는 무리수를 두었고 분위기는 깨져버렸다.
그는 애썼다는 듯 머리를 토닥거려주었지만 정말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무리 그가 개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뱁새는 자기의 보폭을 지켜야 하는 법. 나는 '개그콘서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애쓰지 않아도 제일 재미있는 건 너’라는 마음씨가 관대한 문자를 보내주었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잘 해야겠다.
현정씨는? 사랑과 섹스에 대한 소녀적인 판타지가 넘치지만 생각 보다는 바람직한 섹스를 즐기는 30대 초반의 여성이다.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desirable-h.tistory.com]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