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부터 신문 만화에선 '고바우영감'이 인기를 끌었던 반면, 잡지 만화에선 1974년 선데이서울에 첫 등장한 박수동 화백의 '고인돌'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특히 '고인돌'은 원시인들을 등장시켜 현대 사회를 꼬집으며 성적 풍자를 한 품격있는 작품이었다. 우리 또래는 호기심 속에서 가십이 태반인 선데이서울의 연예인 소식을 접하기도 했지만 먼저 눈이 가는 곳은 만화 '고인돌'이었다. 선데이서울이 인기를 끌자 아류로 발행된 다수의 잡지가 새 연재 만화를 게재했지만 선데이서울의 '고인돌'을 잡진 못했다.
1996년 무렵 시사만화가 박재동이 설립한 애니메이션 회사 오돌또기가 '고인돌'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자비가 문제였다. '고인돌'은 내가 워낙 좋아했던 만화라 나는 흔쾌히 100% 투자를 결정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오성윤 감독이 당시 오돌또기 소속 PD였고, 현재 '로보카 폴리'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김선구 PD가 당시 우리 회사에서 제작 담당을 맡아 '고인돌'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고인돌'은 러닝타임 60분 짜리 비디오로 출시됐다. 얼마 후 벚꽃이 끝물에 접어든 5월, 여의도의 모 커피숍에서 '고인돌'의 원작자 박수동 화백과 만났다. 작품 출시 후 서로 한 번 만나자고 했던 약속이 몇 번 미뤄지고 있던 차에 서로 연락이 됐다. 박 화백은 나를 보자마자 무거운 얼굴로 "애니메이션이 너무 야하게 나왔다. 남보기 부끄럽다"며 한탄했다.
만화 '고인돌'에선 미스 오·육·팔 같은 여자들이 남자 대신 사냥도 하고, 모든 생활에 대해 적극적이다. 고인돌 가족은 시대에 앞서 남녀평등했다. 작가가 성냥개비로 꼬불꼬불 그린 그림은 성적 소재를 풍자와 해학으로 멋지게 포장해냈다. 미국에 이미 '프린스톤 가족' 같은 원시인을 다룬 만화가 있었지만 '고인돌'은 독창적이었다. 소설가 김홍신은 다음과 같이 추천사를 썼다. ''고인돌'은 폭소보다 씨익 웃는 것을 요구한다. 인생을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는 대신 감추어진 본성을 기묘하게 절개하여 보여준다. 옛것을 차용했으되 가장 현대감각이 뛰어난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나는 언제나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박 화백의 말을 듣고는, 그가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눈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보는 듯한 섹시함으로 표현됐어야 했는데 야함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경향을 말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나로선 투자하고도 욕먹은 꼴이 됐다. 나름 최선을 다한 제작진들의 애로사항을 알기에 당시 제작진에게는 이 사건을 전하진 안았다. 작품도 이미 완성됐고, 출시 준비가 다 된 후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제작진도 고민이 많았다. 원래 야하면서도 웃긴 '고인돌'이 목표였다. 애니메이션을 확 야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가리다 보니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품격있는 야함'을 기대한 원작자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다. 만화 '고인돌'은 한 컷으로 웃기는 묘미가 강했다. 애니메이션에선 러닝타임을 늘려 그 재미를 똑같이 표현하려고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다.
나는 '고인돌' 인형도 재미있게 제작하려 힘을 쏟았다. '고인돌'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그런 대로 나갔지만 인형은 생각대로 나가진 않았다. 지금에 와서 의미를 찾자면, 오성윤·김선구 같은 연출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했다는 점이다. 내가 한 때 '애니메이션·게임 개발자들의 사관학교'라고 불리면서 지금도 투자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