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이 20여년에 달하지만 일반인은 물론, 영화인 중에서도 배우 곽도원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디션만 보면 줄줄이 낙방했고, 간신히 역할을 얻어도 뒤통수만 나오기 일쑤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영화를 그만두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곽도원의 우울한 인생은 2010년 영화 '황해'에 출연하면서 빛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배역 이름이 있는 역할을 얻었다. 하정우에게 살해당하는 김승현 교수를 연기해 영화팬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에서는 최민식을 물고 늘어지는 검사 역을 맡아 '충무로 기대주'로 떠올랐다. SBS '유령'으로 브라운관에도 진출했다. '소간지' 소지섭과 '맞장' 뜨는 '미친소' 역으로 인기를 얻었다. 2년 사이에 곽도원은 무명에서 스타로 발돋움했다.
곽도원은 아직 배고프다. 20여년 만에 얻은 인기를 철저하게 누릴 참이다. 새 영화 '점쟁이들'이 10월 3일 개봉한다. 기존의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유쾌한 캐릭터로 관객을 만난다. 김수로·이제훈·강예빈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주연이다. 이어 소지섭과 랑데뷰한 '회사원', '분노의 윤리학'의 개봉도 줄줄이 대기 중. 이만하면 인생 대역전이라고 할 만하다.
-'점쟁이들'은 오디션이 아닌 감독의 초이스를 받은 작품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개봉하고 신정원 감독님이 날 찾았다. 술자리였는데 대뜸 '시민'역이 있다고 작품 제안을 해왔다. 고민 없이 '예 고맙습니다'라고 받았다. 사실 난 시민 1, 2, 3 뭐 그런 역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나리오를 보니 '심인 스님' 역이더라. 역할이 커서 놀랐다."
-개봉을 앞둔 기분도 전과 다를 것 같다.
"역할 비중이 커지니 부담감이 생겼다. 근데 또 자신은 있다. 현장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 현장이 개판이면 좋은 영화 절대 안 나온다. 이번에는 배우들이 오케이 사인이 나도 알아서 '한 번 더 찍자'는 분위기였다."
-같이 출연한 배우들과는 호흡이 잘 맞던가.
"수로 형은 분위기 메이커다. 별거 아닌 연기에도 '야 너 재미있다. 그거 한 번 잘 살려봐'라고 칭찬해줬다. 재치가 장난이 아니고 임기응변도 좋다. (강)예원이랑 (이)제훈이도 착한 녀석들이다. 친형제처럼 어울리면서 즐겁게 촬영했다."
-극 중에 귀신 보는 능력을 가졌다. 실제로 귀신 본 적은 있나.
"돌아가신 어머니가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꿈속에 나타난다. 한 번은 운전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야 병규야 일어나!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갓길에 차를 세웠는데 고속도로 위로 낙석이 떨어지는 거다. 십년감수했다. '황해'도 어머니 덕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을 볼 때 마다 떨어져서 '황해' 오디션도 가기 싫었다. 짜증이 나서 낮잠을 자는데 또 어머니가 꿈속에서 '병규야 일어나!'라고 하는 거다. 놀라서 부랴부랴 씻고 갔는데 척 붙었다."
-'유령' 출연 이후 대중 스타가 됐다.
"길거리를 다니면 '곽도원이다. 미친소다'라며 알아본다. 이제 쑥덕쑥덕 거리는데 적응이 됐다. 여성팬보다는 남성이 더 좋아해주는 것 같다. 내가 무서워서 그런지 숨어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하. 결혼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인연이라는게 있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싫어한다. 외로워 죽겠다."
-소지섭과는 '회사원'에서 또 만났다. 이젠 친형제 같겠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친구가 워낙 말이 없다. 이제 뭐 말 놓는 정도는 됐다. 지섭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남자답다. 무엇보다 성품이 좋다. 배려심이 굉장하다. 보통 위급한 상황에 몰리면 자기 생각을 먼저 하는데 그 친군 남을 먼저 돌보더라. '이 친구의 빈틈이 뭘까' 내가 그걸 찾고 있다."
-팬이라고 밝힌 이미연과도 만났다.
"이미연 선배랑 촬영하는 신이 없어서 죽을 것 같이 아쉬웠다. 중학교 때 부터 엄청나게 좋아했다. 선배가 모델로 있는 화장품 카탈로그 사진을 벽에 붙여놨을 정도다. 촬영장에 찾아가서 두어 번 뵜는데 굉장히 여성스럽고 여렸다. '여자 최민수'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부모님 두 분이 일찍 돌아가셨다.
"살아생전에 작품도 못하고 돈도 못 버는 답답한 모습만 보였다. 내 작품 중 삼촌의 '빽'으로 들어간 연극 '코러스' 딱 한 편 보셨다. 지금 연기하는 모습을 보셨으면 많이 좋아하셨을 텐데, 마흔이 되가니 철이 든다."
-존경하는 선배는 누구인가.
"최민식 선배님이다. 작품에 임하는 자세와 연기 철학이 좋다. 그에 비하면 난 멀었다. 잘 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뒤돌아보면 아직도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여기까지 잘 버텨 온 것 같기도 하고…."
엄동진 기자 kjseven7@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0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