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상은 꿈도 못 꾸는 선수였습니다. 오랜 2군 생활을 할 땐 야구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시상대에 오른 박병호(26·넥센)는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으로 힘이 돼 준 분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장석 대표팀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고 말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표님, 올 시즌 연봉 기대하겠습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장석 넥센 사장도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병호가 프로야구 최고 선수가 됐다. 그는 5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넬탈호텔에서 열린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 및 신인왕 시상식에서 총 유효표 91표 중 73표를 받아 트로피와 MVP 상금 2000만원을 받았다. 넥센은 이날 서건창이 신인왕을 받아 겹경사를 누렸다. 박병호는 "지금도 피땀 흘리면서 열심히 하고 있을 2군 선수에게 희망과 용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 박병호의 반전을 이끈 넥센과 가족. 그도 얼마 전까지 2군 선수였다. 2005년 1차 지명으로 LG에 입단한 박병호는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했다. 2군 경기에선 잘 쳤지만 1군에 올라가면 죽을 쒔다. 2008년 상무 야구단에서 전역하고 팀에 복귀한 뒤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성적을 내야 하는 LG 구단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박병호는 "어렸을 땐 그럴 수 있다 쳐도 제대한 뒤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2군 선수인가', '난 야구를 못 하는 선수인가'란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한 박병호의 아버지는 친구들에 야구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한다. 박병호는 "그런 말을 듣고 굉장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자리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넥센이 2011년 트레이드 마감 시한인 7월31일, 박병호를 LG로부터 데려왔다. 김시진 전 감독은 그를 4번 타자로 못 박았다. 그는 후반기에만 12홈런을 몰아치며 잠재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올해 31홈런 105타점을 올린 박병호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올 시즌 활약 역시 그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박병호는 넥센과 함께 가족을 야구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았다. 박병호의 부모님은 못 할 때나 잘 할 때나 한결같이 아들을 묵묵히 응원했다. 지난해 12월 박병호의 반려자가 된 이지윤씨도 박병호를 도왔다. 올 시즌 박병호가 부진할 때면 "언제부터 야구 잘 했느냐"며 부담을 덜어줬고 시즌 중반엔 다니는 직장까지 관두고 박병호 지원에 올인했다. 이날 타격 부문 3관왕을 더해 2900만원을 받은 박병호는 "아버지 차가 30만 킬로가 넘었다. 받은 상금으로 새 차를 장만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 넥센을 가을 야구로 이끄는 것이 꿈. 넥센은 박병호의 맹활약에도 올 시즌 6위에 그쳐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그 점을 아쉬워한 박병호는 "예전엔 포스트시즌 보며 '그냥 하는구나' 했지만 올해는 책임감이 생겨 마음이 무거웠다. 몸이 근질근질해 집에서 방망이를 돌렸다"고 털어놨다. 이지윤씨가 그런 박병호에 "그만 좀 하고 쉬라"고 할 정도였다.
박병호는 "올해는 홈런 치고 진 경기가 많았다. 내년 시즌에는 홈런보다 타점을 많이 올려 팀 승리에 보탬이 되고 싶다. 발전에 신경쓰면 성적이 떨어질 거라는 불안감을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에 덧붙여 "이승엽·심정수 선배가 한창 홈런을 칠 때 잠자리채를 든 관중이 많았다. 그런 문화가 다시 조성될 수 있도록 더 많은 홈런을 쳐보고 싶다"는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일본 가고시마 마무리 훈련에 가지 않고 개인 훈련 중인 박병호는 "내일도 목동구장에 나가 운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우철 기자 beneath@joongang.co.kr